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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자의 어머니였다면…
    맹자(孟子)는 기원전 372년경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 맹자가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는데 함께 놀 친구가 없다 보니 맹자는 어른들이 장례를 치를 때 하는 곡(哭)소리와 몸짓을 따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맹자가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면서 놀았다. 맹자의 어머니는 또다시 이사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번에는 서당 가까이 집을 옮겼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책을 읽는 등 예법(禮法) 놀이를 했다. 열녀전(列女傳)에 나오는 이 고사는 직업이나 신분의 귀천(貴賤)을 따지기 위한 예로 드는 이야기는 아니다. 교육에 있어서 환경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일화로 자주 인용된다. 맹자가 살았던 시절의 중국은 자식 교육은커녕 그야말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고 삶을 연명하기에도 급급했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럼에도 2,500년 전 맹자의 어머니는 왜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 번이나 이사를 하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을까? 그녀는 ‘강남의 귤이 강북으로 옮겨가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나 ‘구부러진 쑥도 삼밭에서 자라면 곧게 자란다’는 마중지봉(麻中之蓬)의 참뜻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시는 가칭 중앙도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3년 전부터 일련의 절차를 거치며 디자인과 명칭, 콘텐츠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사업 초기 단계부터 많은 시민들이 입지 선정의 부적합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즉, 서산의 노른자 땅인 호수공원 내 문화시설용지 5,000㎡에 370억원을 들여 지상 4층 규모로 도서관을 짓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는 많은 술집과 노래방 등 유흥가가 밀집해 있고 바로 옆 호수공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운동을 하고 공연도 벌이며 집회를 열기도 한다. 이런 곳에 도서관을 세워 서산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비록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려진다고는 하지만 도서관은 엄연히 시민들의 학습권과 지식탐구권이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오랜 고민과 심사숙고 끝에 중앙도서관 건립 전면 재검토라는 힘든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중앙도서관을 짓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입지에, 좀 더 높은 수준의 콘텐츠를 갖춰, 좀 더 많은 시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서산의 랜드마크를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동안의 땀과 노력, 시간과 비용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날려버리는 것이 아닌 소중한 경험과 노하우로 삼아 제대로 된 곳에 제대로 된 도서관을 지어 시민들의 알권리와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겠다는 것이다. 더하여 많은 시민들이 열망하는 시청사와 종합예술회관 등 주요 기반시설과 중앙도서관을 같은 잣대 위에 올려놓고 우선순위와 지역적 안배 등을 고려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깊은 뜻도 함께 담겨 있다. 서산의 미래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 그리고 서산시민들의 미래를 조금만 더 멀리 깊이 있게 생각한다면 결코 반대할 일이 아닌 것이다. 맹자와 비슷한 시기 노(魯)나라에 미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미생은 사랑하는 여인과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자는 나오지 않고 폭우가 쏟아지자 다리기둥을 안고 버티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이다. 과거에 얽매여 미생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내다보며 맹자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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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5-30
  • 풀이냐 꽃이냐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모처럼 도타운 정을 주고받아야 할 때 아내와 다퉜습니다. 다퉜다고 하기보단 그저 두어 마디 큰소리가 오간 것이지만, 어쨌든 다툼은 다툼이었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보니 우리 집 담장 밑에 자라고 있는 풀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얼마 전에 뽑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잊고 있었던 풀입니다. 샛길을 따라 연이은 담장인데 유독 우리 집 담장 밑에만 파랗게 자라고 있습니다. 담장과 아스팔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풀이었습니다. 끈질긴 생명력에 새삼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함을 느끼면서 한 포기 한 포기 잘라내었습니다. 크지도 않은 풀이 벽에 바짝 붙어 있어 작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사리 제거하고 보니 정갈하고 깨끗한 길이 되었습니다. 이 길을 지나가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게으른 주인을 흉보았을까? 내심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어제 배달온 수필집을 읽고 있노라니 밖에서 아내의 자지러질 듯한 고함이 들렸습니다. 그 날카로운 소프라노 소리는 열어 놓은 현관문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무슨 큰일이 났나 싶어 방문을 열고 나갔더니 누가 담장 아래 꽃을 다 잘라 놨다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내가 그랬다고 하니 그걸 기르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냐며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어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풀이지 무슨 꽃이냐고 했더니 보면 모르느냐면서 반지꽃과 민들레꽃이라 했습니다. 어쩐지 낯이 익은 풀이란 생각은 들었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생각해보니 얼핏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 아내의 입장이 뒤바뀐 것 같았습니다. 나는 명색이 시인이고 아내는 시 한 편 읽지 않는 생활인입니다. 풀을 꽃으로 보는 사람이 시인이어야 하고 꽃을 풀로 보는 사람이 생활인이어야 합니다. 그쯤에서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아내도 더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큰 소리 몇 번 주고받고 나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기분은 좋지 못합니다. 풀로 보느냐, 꽃으로 보느냐의 시각은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도대체 풀 아닌 꽃이 어디 있고 꽃 아닌 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요? 풀로 보면 풀이고 꽃으로 보면 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나 지금이나 풀이냐 꽃이냐로 사회적 갈등이 무수히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지금은 아주 당연하게 건물 안에 화장실이 있지만, 7~80년대엔 대부분 화장실이 밖에 있었던 시절, 어느 교회에서 새로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 문제로 무려 6개월 동안이나 설계를 끝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건축 위원 장로들 가운데 일부는 거룩한 성전에 어떻게 화장실을 교회 안에 짖느냐 반대를 하고, 다른 장로들은 요즘이 어느 땐데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서로 우기다 보니 그렇게 지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담임 목사님이 기도 중에 묘안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반대하는 장로에게 묻기를 장로님, 항문이 몸 안에 있나요? 아니면 밖에 있나요? 물으니 몸 안에 있다고 하자 바울 사도는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했는데 몸 안에 항문이 있으니 화장실도 교회 건물 안에 지어도 무방한 것 아니냐 물어 드디어 고집을 꺾고 승낙했다는 교회 건축사에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풀이냐 꽃이냐의 다툼이었습니다. 문득 오래전에 있었던 청성산 도롱뇽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청성산터널 공사 때 한 스님의 반대로 공기가 3년이나 늦어졌고 무려 145억 원 정도 손해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염려하던 도롱뇽은 잘 서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스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조선 시대에 있었던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가져왔던 당파 싸움도 따지고 보면 풀이냐 꽃이냐의 싸움이었습니다. 1년 복(服)이면 어떻고 3년 복이면 어떻겠습니까? 오늘의 정치 현상을 바라보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거창한 명분이나 가치관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풀이냐 꽃이냐의 다툼일 뿐입니다. 담 밑의 풀이든 꽃이든 우리 가정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놔둬도 되고 뽑아도 되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연일 매스컴을 도배하는 것도 담 밑의 풀이냐 꽃이냐의 싸움밖에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정의 달, 부부의 날을 맞아 우리 주변에도 풀이냐 꽃이냐로 갈등을 빚고 있는 건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5-30
  • 택시운수종사자의 유류비 부담 약정은 무효
    [요지] 택시운수종사자가 유류비를 부담하는 약정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유류비 상당 임금 지급을 청구한 사건(대법원 2023. 4. 27. 선고 2022다307003 판결) [개요] 택시 운행 비용 등을 택시운수종사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을 금지한 구 ‘택시운송사업의 발전에 관한 법률’제12조 제1항이 강행규정인지 여부가 문제된 사안. [대법원] 구「택시운송사업의 발전에 관한 법률」(2020. 6. 9. 법률 제17453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택시발전법’이라 한다) 제12조 제1항(이하 ’이 사건 규정‘이라 한다)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구역의 택시운송사업자는 택시의 구입 및 운행에 드는 비용 중 다음 각 호의 비용을 택시운수종사자에게 부담시켜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면서, 각 호에서 유류비(제2호) 등을 들고 있다. 유류비를 택시운수종사자에게 전가시킨 택시운송사업자에 대하여는 국토교통부장관이 택시운송사업면허의 취소, 일정기간 사업의 정지, 감차 등이 따르는 사업계획 변경을 명할 수 있고(제18조 제1항 제1호),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제23조 제1항). 구 택시발전법은 택시운송사업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여 택시운수종사자의 복지 증진과 국민의 교통편의 제고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것으로서, 이 사건 규정의 취지는 택시운수종사자가 부당한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열악한 근로 여건에서 초래되는 과속운행, 난폭운전, 승차거부 등을 미연에 방지하여 승객들이 보다 안전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에 있다(헌법재판소 2018. 6. 28. 선고 2016헌마1153 결정 참조). 위와 같은 택시발전법의 제정목적과 이 사건 규정의 도입취지 및 내용, 이 사건 규정을 위반한 행위가 각종 행정제재 및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되는 점, 택시운송사업의 공공성과 택시운송사업자에 대한 택시운수종사자(택시운전근로자)의 종속적 지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택시운송사업자의 운송비용 전가를 금지하는 이 사건 규정은 강행규정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택시운송사업자와 택시운전근로자 노동조합 사이의 합의로 이 사건 규정의 적용을 배제하거나 유류비를 택시운전근로자들이 부담하기로 약정하는 것은 무효이다. 나아가 택시운송사업자가 유류비를 부담하는 것을 회피할 의도로 노동조합과 사이에 외형상 유류비를 택시운송사업자가 부담하기로 정하되, 실질적으로는 유류비를 택시운전근로자에게 부담시키기 위해 택시운전근로자가 납부할 사납금을 인상하는 합의를 하는 것과 같이 강행규정인 이 사건 규정의 적용을 잠탈하기 위한 탈법적인 행위 역시 무효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대법원은 원고를 포함한 피고 소속 택시운수종사자들이 초과운송수입금에서 유류비를 부담하기로 하는 이 사건 유류비 부담 약정은 강행규정인 이 사건 규정을 위반하여 무효이고, 원고가 이 사건 규정 시행 이후에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피고에게 기준운송수입금을 납입하고 이를 제외한 초과운송수입금을 보유하면서 피고로부터 일정한 고정급을 지급받는 방식인 정액사납금제 형태로 임금을 지급받으면서 무효인 유류비 약정에 따라 유류비를 부담하였으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그 유류비에 상당하는 임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원심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사례제공 : 박범진 변호사 (서산시 공림4로 22, 현지빌딩 4층, 상담전화 : 041-668-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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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5-30
  • 고향 시의회, 좋은 소식을 듣고 싶다
    좀처럼 비판적 기사를 쓰지 않는 <서산타임즈>가 연거푸 큰 지면을 차지하는 글을 냈다. 사안의 비중을 크게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서산시의회 관련 이야기다. 먼저 지난 4월 12일 자 “서산시의회 ‘싹수’가 필요하다”라는 글을 보자. ‘모든 음식의 맛이 다르듯, 정치 영역도 맛이 다르다. 권력 맛을 본 사람들은 그 맛을 아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맛을 알아도 본질적인 과업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지(知, 智)와 ‘싹수’가 필요하다. 지(知)와 지(智)는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그것을 올바르게 판별하고 처리하는 능력이다. 지금 서산시의회에 필요한 것은 ‘싹수’이다.’ 같은 날짜 “서산시의회 ‘왜 이러나?’”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의원 간 ‘막말’ 논란으로 갈등이 커지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의회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이어 5월 4일 자 ‘서산시의회 점입가경, 의원 간 고소로 확산’ 기사는, 내부에서 조정하여 마무리해야 일을 외부의 기능에 맡기는 현상이 지방자치의 현주소는 아닌지 걱정하게 한다. 지방의회가 30년 만에 부활한 지 다시 30여 년이 흘렀다. 이제 장년의 연륜을 쌓았고 나름 성장했다. 하지만 안건이나 지역 현안이 아닌 일로 갈등이 표출되고 밖으로 알려져 시민과 지역사회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인격이나 자질로 비화하고 나아가 지방의회 무용론까지 부추긴다면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 온 지방자치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지방의회의 성과를 부인할 수 없다. 지방의회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의와 가치가 있다. 시 공무원이 일할 때는 의회를 의식하면서 한 번 더 챙겨 보게 된다. 의회의 의결은 집행부가 하는 일을 ‘인정하고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서산타임즈> 이병렬 대표의 글 가운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시의원들의 일탈도 끊이지 않았다. A 의원은 시 고위공직자의 멱살을 잡고 막말한 의혹과 함께 의회 사무국 여직원에게까지 모욕적인 막말을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파장을 일으켰다. B 의원은 자신의 차량을 운전하다 주차된 차량과 접촉 사고를 내고도 그대로 현장을 떠나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시민들은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제9대 서산시의회 개원을 반겼다. 하지만 지난 10개월 동안 의원 간 다툼과 자질 문제, 갑질 논란으로 내홍을 겪었다. 상임위원회에서 일부 의원들은 턱을 괴고 질문을 하는가 하면 언성을 높이고 질문 후 답변을 듣지도 않았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훈계하듯, 수사기관이 범죄인을 다루듯 다그쳤다. 많은 공무원이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공무원을 통해 들은 시의원들의 자질과 갑질 논란은 부지기수이다.’ 공사 간 겸손하고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품위를 잃고 본분을 망각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마치 국회의원들이 청문회나 국정감사에서 국무위원이나 기관장들에게 호통치고 억지 부리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의원 자신은 턱을 괴고 버티는 자세로 질문하며 “자세를 바로해요”라거나, 민간인인 증인에게도 “팔짱 푸세요.”라고 소리친다. 무언가 자신이 없거나 비뚤어진 우월감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혹시 국회의원의 이런 장면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흔히 ‘국민의 대표’를 내세우는데 이럴 때는 ‘대표’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필자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지방자치의 기초 원리는 이렇다. 어느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이 살다 보니 길을 내야하고 공공건물을 지어야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모셔야 하고 교육시설이 필요했다. 행정공무원과 질서유지를 위한 보안관도 있어야 했다. 여기에는 비용이 얼마나 소요되고 이를 어디서 어떻게 충당할까 하는 방안을 논의해야 했다. 이러한 일을 모든 주민이 나서서 할 수 없으니, 대표자를 뽑았다. 대표자는 주인이 아니라 머슴이고 봉사자이어야 했다. 이런 원리로 접근하고 시민과 지역을 생각하며 마을 일 보듯 오순도순할 수는 없을까?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 런던 의회를 가 본 적이 있다. 의장은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보며 회의를 진행했다. 의원들은 긴 의자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토론했다. ‘권위’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지방의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방의원과 공무원은 한 고장에서 지역의 일을 수행한다. 다만 역할이 다를 뿐이다. 한편 시민, 의원, 공무원은 이런저런 ‘연’을 맺고 지내는 이웃이다. ‘연’이 공적인 관계를 흩트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상호 존중해야 한다. 공무원은 더욱 준비해야 한다. 의원은 겸손하고 진정 봉사자로서 헌신한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본연의 책무가 무엇인지 심사숙고하고 새 출발 한다는 각오로 신발 끈을 다시 매기 바란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더 큰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방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를 과연 유지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의문을 가져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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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5-25
  •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분원의 서산행은 시대 흐름
    올해 2월 정부에서는 미래산업 먹거리로 그린바이오 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그린바이오 산업화 촉진, 혁신기술 개발, 인력 양성, 산업생태계 조성이 주요 골자다. 그린바이오 산업은 농업생명자원에 생명공학기술 등을 적용, 농업과 전‧후방산업 전반에 걸쳐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친환경 첨단 신성장산업이다. 주요 분야로 종자, 동물용 의약품, 미생물, 곤충, 천연물, 식품 소재 등을 포괄하며, 화석연료 생산 기반을 바이오로 대체해 지속가능성을 제고할 수도 있다. 이런 정부 정책 방향에 발맞춰 서산시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하 ‘생명연’)은 서산분원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생명연은 식물 유전체, 미생물 유전체, 유전자 치료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 서산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생명공학 연구기관인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연구 활동을 펼치기에 최적의 입지 환경이다. 예로부터 상서로운 땅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농업자원, 축산자원, 수산자원 등 그린바이오 연구를 위한 최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천수만 A‧B지구를 포함한 경지면적이 27,605ha에 달하며 전국 3위의 쌀 생산량 규모를 자랑한다. 그뿐만 아니라 생강, 6쪽마늘, 달래 등 다양한 특용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축산자원으로는 한우개량사업소라는 전국 최대 한우 번식 기반이 있다. 국내 한우의 98%가 이곳에 사는 씨수소의 자손들이다. 매년 320종, 50만 마리의 철새가 도래하는 천수만은 세계적 철새 도래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며, 최근 흑두루미도 다수 관찰되고 있다. 국내 최초의 해양생물보호구역인 가로림만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물막이 공법으로 탄생한 간월호와 부남호 등 담수 자원도 있다. 이 모든 자원이 생명연 서산분원의 활동 무대이다. 이러한 넉넉한 자원에 인프라도 갖춰 그린바이오 육성도시로 최적이다. 한서대학교,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 등 지역혁신기관이 있으며, 충남 지역에 충남농업기술원, 한국생산기술연구소, 충남테크노파크 바이오센터(동물약품허브), 충남동물위생시험소 등 바이오 관련 기관이 있다. 생명연 분원이 서산시에 들어와 다양한 자원과 인프라와 만나게 되면 그 시너지는 엄청날 것으로 기대된다. 조류인플루엔자, 아프리카돼지열병 등 그린백신을 연구하고 가로림만과 천수만의 미세조류를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소재와 생산 기술을 연구할 수 있다. 한우개량사업소와 연계해 축산업 생산성 증대를 위한 융합 원천기술을 개발할 수 있으며, 대기, 토양, 수질 환경오염 개선을 위한 그린바이오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석유화학 산업 체질개선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는 최근 국내외적 정세와 맞물려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인 대산석유화학단지의 체질개선과 탄소중립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외에도 생명연이 연구 및 실증할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현재 서산시는 생명연 서산분원 유치를 위해 국토연구원 타당성 조사에 임하고 있으며, 올해 7월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다. 통과 시 2024년부터 건설에 착수해 2027년 연말 준공한 후 2028년부터 운영에 들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쌀 생산 규모 전국 3위와 한우개량사업소, 천혜의 생태를 간직해 환경가치 1호로 평가되는 가로림만, 세계적인 철새도래지, 간월호와 부남호,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인 대산석유 화학단지 등 이보다 좋은 조건을 가진 지역을 없을 거라 자부한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처럼 연구기관은 연구자원이 많은 곳에 입지하는 것이 타당한다고 본다. 그린바이오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그린바이오 산업을 선도하기 위해 서산시에 생명연 분원이 들어서야 한다. 지난해 충남도, 생명연, 서산시가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처음 시작한 것처럼 그 끝도 서산시에서 결실을 맺어야 한다. 18만 시민과 서산시는 그린바이오 선도도시로 도약할 준비가 돼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3-05-25
  • 왜 가시가 달렸나?
    무관심과 무시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두 단어는 사촌 간처럼 여겨집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초에도 책을 내었습니다. 어김없이 지인들에게 많은 분량의 책을 우편으로 배송했습니다. 대부분 가까운 분이거나 같은 문학회 회원이거나 그동안 내게 책을 보내주신 분이었습니다.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꼼꼼히 챙겨 보내드렸습니다. 한 분 한 분 이름을 쓰다 보니 꼭 생각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의원님들이었습니다. 서산 시민을 위하여 수고할 뿐만 아니라 문학 하는 사람으로서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 애를 써 달라는 뜻도 있었습니다. 주소를 수소문해서 모두 집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대부분 보통 사람들은 책을 받고 문자나 전화로 인사표시를 해주십니다. 보통 우편을 이용하여 발송하기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했다가 문자나 전화를 받으면 안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의원님 한 분 이외는 누구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꼭 짜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선거 때엔 가을 낙엽처럼 마구 흩날리던 그 흔한 문자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기하면서도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책을 보내라고 했느냐고 따지면 할 말은 없습니다. 물론 인사를 받자고 보낸 건 아니었습니다. 또 보내 달래서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은근히 배신당한 기분도 들었고 무시당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나도 작가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입니다. ‘워낙 바쁘신 분들이니 그렇겠지’ 하며 마음을 돌렸지만 다시는 정치인에게 책을 보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웃과 이웃 사이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족 사이에도 무관심이라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자살률과 늘어나는 고독사는 어쩌면 무관심의 저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빌딩의 숲속에서 사는 도시의 사람들은 이웃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사는 게 다반사입니다. 급증하는 1인 가구의 증가와 무관심한 사회의 풍조 속에 고독사는 이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법까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소위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그것입니다. 지난해 4월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상대방을 가장 아프고 답답하고 숨 막히게 하는 가장 예의 바르면서도 잔인한 방법이 무관심이라 했습니다. 엊그제 지인이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과는 무관심하게 산다고, 그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문득, 우리는 무관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요? 러시아의 작가 투루게네프의 ‘거지’란 산문시가 있습니다. ‘길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늙어 빠진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눈물 어린 충혈 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더러운 상처…. 아! 아!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 먹는 것일까요?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날따라 지갑도, 시계도 없고 손수건마저 없었습니다. 당황한 나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고 이야기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파리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적선입니다.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거꾸로 이 형제에게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춘산을 오르다가 무심코 등산로 가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었습니다. 따끔해서 내려다보니 가시나무였습니다. 순간, 보잘 것도 없는 하찮은 수풀 속 야생나무 주제에 무엇 때문에 가시가 달렸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도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시하지 말라는 무언의 항거였습니다. 관심을 가져 달라는 호소였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로 유명한 엘리 위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고 무관심이다.’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요? 나는 얼마나 이웃에게,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돌아봤습니다. 나도, 나만 보며 살아왔습니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이웃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주지 못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의원들에게 가졌던 서운함도 날려버렸습니다. 당장 스마트폰을 꺼내어 나에게 문자를 보낸 여러분께 간단하게나마 댓글을 달았습니다. 모두 나에게 관심을 가지신 고마운 분들입니다. 관심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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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5
  • 서산의 천재 시인 ‘오청취당’을 기리며
    감히 그리고 짠한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조선 후기 서산의 천재 여류 시인 오청취당(吳淸翠堂·1704~1732) 이야기다. ‘감히’는 청취당의 생애와 시 세계를 깊이 있게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무엇인가 쓰고 싶은 욕구가 간절해서다. ‘짠함’은 녹록치 못한 삶 속에서 천부적인 문재를 미처 펼쳐보지 못하고 요서한 삶을 미루어 보며 갖는 마음이 하나요, 오 시인과 시인의 보석 같은 시가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있었음이 또 하나이다. ‘청취당’은 ‘성자의 맑은 성품과 대나무의 푸른빛을 취해’ 스스로 지은 아호다. 청취당은 경기도 평택 포승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세 살 된 남동생과 새어머니가 들어온 뒤 낳은 일곱 동생들까지 건사하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 집안일을 거두느라 길쌈과 바느질을 손에서 내려놓을 겨를이 없었다. 22세 때 서산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 마을의 김한량(金漢良)과 혼인하여 29세로 별세할 때까지 7년 동안 살았다. 결혼생활동안 두 자식을 잃었고 가난과 병마, 고독으로 몸부림치며 살다가 평소 그토록 동경하던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청취당은 인생의 희로애락, 계절, 기상 등 모든 사물을 소재로 현실과 이상세계를 표현한 182수의 한시를 『청취당집(淸翠堂集)』으로 엮었다. ‘청취당집’은 1803년에 외손 박종규에 의해 편찬되었다. 규방규수인 청취당이 쓴 시를 보고 당대 문인들은 당나라의 문장가들과 견줘 비견할만하다고 했을 만큼 뛰어났다. 한문은 물론이고 수많은 경전과 고사에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어야 비로소 쓸 수 있을 만큼 넓이와 깊이가 있는 글로 가득하다. 청취당이 세상을 떠난 해는, 시댁과 같은 경주 김씨 가문인 정순왕후(1745~1805)가 태어나기 13년 전이다. 청취당이 생활한 마을은 왕후가 태어난 한동네이고 왕후는 시댁 조카 항렬이니, 청취당이 만약 환갑까지 살았더라면 당대에 이미 문향을 떨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을 가져본다. 청취당은 쇠잔한 양반 가문에서, 게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한 탓인지 우리나라 고전 문학사에 서는 생소했다.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 허난설헌, 김호연재 등의 배경이나 후광과 비교하여 보면 아쉽기만 하다. 다행히 최근 걸출한 여류시인으로 조명되고 있음은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청취당의 작품을 번역하여 알리는 계기를 만든 문희순 국문학박사는 “오 청취당은 역대 시화사나 문학사에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여성시인이나 그녀가 지은 작품을 볼 때 조선시대 유명 여류문인들과 비교해 볼 때 뒤지지 않을 정도의 높은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라고 했다. 청취당의 시비는 두 곳에 세워졌다. 하나는 음암면 유계리에 있는 ‘논우칠공(論友七功, 일곱 친구의 공로)’이고 또 하나는 팔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자탄(自嘆, 스스로 탄식하며)’이다. ‘논우칠공’은 바느질하는데 쓰는 바늘, 실, 인두, 다리미, 가위, 골무, 자를 통한 삶의 이야기이다. 규방문학의 대표적인 글로 알려진 ‘규방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가 바느질하는데 필요한 일곱 가지 도구가 서로 공을 다투는 장면을 그렸다면, 청취당의 논우칠공은 서로의 공을 치하하여 긍정적인 면을 표현했다는데서 그 차원이 다름을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규방칠우쟁론기와 또 하나의 침선도구인 바늘을 주제로 쓴 ‘조침문(弔針文)’보다도 훨씬 앞선 시대의 글로 그 의미를 더한다. ‘연적(硯滴)’은 곤륜산과 용을 끌어온 스케일과 은방울, 옥줄처럼 예쁜 낱말로 연적의 가치를 드러냈다. 더욱이 ‘문방사우’의 반열에 연적을 더하여 ‘문방오우’로 논의가 있음직한데 그 없음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형상과 사물을 주로 ‘삼(三) 또는 ‘사(四)’를 테두리로 묶는 세인의 관념이나 관행의 한계를 짚으며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연적 硯滴 誰刻崑精作妙硯 文房四友五成眞 搖揚口吐銀鈴散 傾瀉耳垂玉索伸 魚見若壺望救活 龍看似窟恨無雲 陶泓毛潁封功日 何不贈號此器論 “누가 곤륜산 정기 깎아 묘한 연적 만들었나?/ 문방사우 연적 더해 오우가 바른 것이지/ 흔들어대면 입으로 은방울 흩어 토해내고/ 기울이면 귀에서 옥줄 드리워 쏟아내네/ 물고기가 보면 병 같아 살려주길 바랄 터요/ 용이 볼 땐 굴속 같으니 구름 없음 한할 일 도홍과 모영에게 공을 봉하던 날에/ 어찌 연적에겐 호 내리는 의론 없었을까“ 이처럼 뛰어난 청취당의 문학을 재조명하고 서산 여류문학 활성화를 위하여 영정(影幀) 제작, ‘여성문학축제’ ‘휘호대회’를 비롯하여 지역 브랜드로 삼기 위한 콘텐츠 발굴을 기대한다. 5월은, 15일 아들 언주(彦柱)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요서하였으니 기림의 달이었으면 한다. 주 : 『역주 청취당집』 (문희순 역주, 2008, 서산문화원), ‘오청취당을 찾아가다’ (『태안문화』, 2019. 제31호, 최경자), ‘한국여성인물사전’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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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예술은 사회 발전의 근간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정신 작용이라 할 것입니다. 바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동물적 욕구만으로는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화가 생기고 예술이 생겼습니다. 문화예술은 창의성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그를 통하여 사회와 개인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립해줍니다. 그리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 더불어 경제적 가치도 창출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연설하던 중 조크로 던진 말. “내 이름은 들어 본 적은 없어도 BTS나 블랙핑크는 알 것이다. 그러나 BTS가 저보다 백악관을 먼저 갔지만, 여기 미 의회에는 다행스럽게도 제가 먼저 나왔다.”라고 하여 장내에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문화의 힘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일국의 대통령과 동급의 위치까지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민간 개인에게만 맡겨둔다면 아무리 개인적인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시나리오 작가가 생활고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11년 최고은 작가의 생활고로 인한 비극적 죽음에 당시 온 사회가 떠들썩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예술인의 복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소수의 사람이야 막대한 수익을 올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문화예술 분야의 종사자들은 수입이 충분하지 않거나 심지어 생계의 위협도 받게 되어 결국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문화예술의 열악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그해 10월에 예술인 복지법이 법률로 제정되었습니다. 이후 활발한 논의를 거쳐 2022년 9월 25일부터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이 시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란 속담도 있듯이 아무리 법률이 제정되고 보장한다고 해도 피부에 닿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여전히 예술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서산시에서는 4월 28일부터(30일까지) 충남 최초로 전문 예술인에게 창작 수당을 지급했습니다. 대상은 2023년 1월 1일 이전 6개월 이상 주소를 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발급한 예술활동증명 소지자에게만 해당하며 농어민 수당이나 기타 직업과 관련한 수당을 받는 자는 대상자 선정에서 제외하였습니다. 많은 분이 신청하였으나 중복수당지급자나 거주 기간 관계로 인하여 실제 대상자는 183명이었습니다. 지급대상자에게는 서산사랑 상품권 50만 원씩 지급되었습니다. 늘 새로운 길을 가려면 어려움이 따릅니다. 도전의 역사는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충남에서 최초로 시행되는 전문예술인창작수당을 지급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애로가 있었을까요? 바른길이란 확신이 아니면 쉽게 결단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정책을 결정하여 주신 시장님의 탁월한 예술 사랑 정신과 수고하신 관계자 공무원 여러분 그리고 문화예술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신 의원 여러분께 전문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50만 원이란 금액은, 크다면 크고 적다면 턱없이 부족한 돈입니다. 그러나 이번 서산시에서 지급한 예술인창작수당은 돈이 아니고, 자부심입니다. 자부심을 나눠준 것입니다. 예술인이라는 긍지를 심어 준 밑거름입니다. 전문 예술인으로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의욕과 책임감과 의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예술은 사회 발전의 근간입니다. 예술은 인간의 품격과 삶의 질을 올리는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감동을 주고 따뜻한 인간애를 갖게 하며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매개체요 징검다리입니다. 행복한 서산. 석양의 노을이 아니요,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해 뜨는 서산의 이름다운 문화예술이 꽃피는 예향의 도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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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공사로 인한 소음·진동 손해배상은?
    [요지] 공사로 인한 소음·진동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대법원 2023. 4. 13. 선고 2022다210000 판결) [개요] 원고는 앵무새를 사육·번식하여 판매하는 판매장을 운영해 왔는데, 피고 1 내지 4는 이 사건 판매장 건물 바로 옆 부지에 이 사건 건물 신축을 위한 건축허가를 받았고 피고 5, 6은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를 수행하였음. 원고는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 현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진동으로 이 사건 판매장의 앵무새가 폐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안. [대법원 판단] 공사현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진동으로 인근 제3자가 손해를 입은 경우 그 위법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소음·진동으로 인한 피해가 사회통념상 일반적으로 참아내야 할 정도(이하 ‘참을 한도’라 한다)를 넘는 것인지 여부이다(대법원 2019. 11. 28. 선고 2016다233538, 233545 판결 등 참조). 소음·진동으로 참을 한도를 넘는 피해가 발생하였는지 여부는 구체적으로 피해의 성질 및 정도, 피해이익의 공공성, 가해행위의 태양, 가해행위의 공공성, 가해자의 방지조치 또는 손해회피의 가능성, 공법상 규제기준의 위반 여부, 토지가 있는 지역의 용도와 이용현황, 토지이용의 선후관계 등 모든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소음·진동을 규제하는 행정법규는 인근 주민의 건강이나 재산, 환경을 소음·진동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하는 소음·진동에 관한 기준을 넘는지 여부는 참을 한도를 정하는 데 중요한 고려요소가 될 수 있다(대법원 2017. 2. 15. 선고 2015다23321 판결 등 참조).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주민의 건강 등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기준이므로, 그 기준을 넘어야만 참을 한도를 넘는 위법한 침해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고 그 기준에 형식적으로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피해의 정도가 현저하게 커서 사회통념상 참을 한도를 넘는 경우에는 위법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대법원 2014. 2. 27. 선고 2009다40462 판결 등 참조). 이러한 기준에 따라 대법원은, 피고들의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로 이 사건 판매장에 발생한 소음이 가축피해 인정기준에 도달하였거나 넘었다고 볼 수 있는 점, 원고가 위 신축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 사건 판매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왔다는 점, 흡음형 방음벽은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가 시작되고 6~7개월 후에 이루어진 조치인 점 등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원고의 피해가 사회통념상 참을 한도를 넘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피고들이 ‘소음·진동관리법 시행규칙’에서 정한 상업지역 생활소음규제기준을 준수하여 공사를 진행하였고 흡음형 방음벽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므로 피고들이 참을 한도를 넘는 위법한 행위를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 사례제공 : 박범진 변호사(상담전화 : 041-668-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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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어린이도 없고, 어버이도 없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 참으로 소중하고 간절한 달입니다. 마음껏 축하하고 위로받아야 할 날. 이렇게 경사스러운 달에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정말 싫습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써야 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상가(喪家)에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의 입구에 붙어 있는 상가안내문에 고인과 상주, 단 두 이름만 있는 상가가 있었습니다. 필자가 문상한 가정도 상주와 남동생 둘뿐이었고 동생은 나이가 오십은 넘어 보였는데 독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인을 여의어 슬픈데 쓸쓸함까지 깃드니 더욱 외로워 보였습니다. 문상하고 돌아와서도 고인과 상주 이름만 씌어있는 안내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인구 절벽 시대라고 합니다. 아예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해도 자녀를 하나만 낳거나 아예 갖지 않습니다. 2017년에 1.05 명이었던 출산율은 2020년 0.84 명, 이제는 0.78 명에 이르러 세계 최저 출산율이라고 합니다. 필자 같은 소시민은 급격한 인구 절벽으로 발생하는 노동력 감소나 경제 성장 둔화, 생산성 감소 같은 국가의 위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들어 보니 홀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재물도 있고 건강하면 혼자 산다는 게 더없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걸리는 것도 없이 새처럼 자유롭게 산다는 게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도 다 갈 수 있고, 좋은 차타고 좋은 음식 먹고…. 지인에게 우스개 같은 소릴 들었습니다. 요즘 결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이를 갖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한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그냥 우스갯소리라면 좋겠습니다. 보도를 보면 국내 1인 가구의 절반 가까이가 빈곤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특히 독거노인의 70%가 빈곤 상태이며 고독사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늙어 이 세상에 의지할 아무도 없는 혈혈단신이라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독은 어찌할 것이며 몸이 아파도 이마에 손 하나 얹어 줄 사람 하나 없다면 얼마나 서러울 것인가요? 아프면 혈육밖에 없고 기댈 데는 가족밖에 없다는 걸 살아 보니 알겠습니다. 한세상 살아 보니 순식간에 가버리는 게 세월이었습니다. 청춘도 잠깐이었고 십 년 세월도 순식간이었습니다. 건강도 자신할 수 없고 나이만큼 나빠지는 게 자연의 이치였습니다. 재물도 보충하지 않으면 밑 빠진 독이었습니다. 대가 끊긴다는 말이 어떤 건가를 보았습니다. 벌써 오십여 년 전 된 이야기입니다. 고향에 P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자녀를 여럿 낳았으나 공교롭게도 자식들은 열 살 이전에 모두 잃었습니다. 두 분만 사시다가 차례로 돌아가셨습니다. 상주가 없어 먼 친척분이 대신하는 걸 보았습니다. 이제는 집터마저 없어진 걸 보았습니다. 몇 천 년 이어온 가문이 사라진 것입니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후로 고인과 상주 하나 덩그러니 씌어있는 안내문을 보고 안타까운 상상이 오랫동안 머리를 어지럽혔습니다. 앞으로 독거노인, 1인 가구, 고독사, 상주 없는 상가 같은 피하고 싶은 단어들이 얼마나 우리를 슬프게 할까요? 혹자는 말합니다. 누구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 사는 줄 아느냐고. 누구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 안 낳는 줄 아느냐고. 오죽하면 혼자 살겠느냐고. 오죽하면 아이 없이 살겠느냐고. 하지만 오천 년 역사 속에 지금보다 더 잘 살던 시대가 있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도 누군가의 손을 빌려 태어납니다. 이 세상 갈 때도 누군가의 손을 빌려 가게 됩니다. 내 맘대로 멋대로 살다가는 건 자유라지만 마지막 가는 길까지 생판 모르는 남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제는 축하해주고 안아 줄 어린이도, 공경 받아야 할 어버이도 없어지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소중한 가정의 달. 어린이에게는 더 따뜻한 보살핌을, 어버이에게 스승에게는 더 진정한 공경을, 부부간에는 더 아름다운 사랑을 갖는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건강 조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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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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