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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쏴라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 이야기-
    6.25가 다가옵니다. 벌써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지도 어느덧 75년이나 되었습니다. 포성은 들리지 않더라도 전쟁은 진행형으로 휴전의 상태지만 여전히 위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의 날 6‧25 하면 꼭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장군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란 말입니다. 이 말과 같은 제목의 책을 보았습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입니다. 이 책은 2010년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6.25 발발 60주년 행사로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백선엽 장군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는 머리말에서 2010년,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회고하면서 아흔의 나이에 남겨야 할 이야기를 기록하여 전쟁을 잊지 않으려는 세대, 그리고 전쟁의 참상을 알고자 하는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이 알려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조국 전선을 지키려다 사라져 간 수많은 영령이 그 희생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을 기억함으로써 이 땅의 안보가 더욱 굳건해져 더 영광스러운 대한민국의 길이 열릴 때 먼저 간 호국영령들에게 보답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남한에서는 6월 24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의 2분의 1 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으니 전방 부대 장병 절반 이상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전쟁 40일 만에 낙동강 일대를 제외하고는 전 영토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때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한 끝에 낙동강까지 밀려왔습니다. 다부동의 마지막 저지선이 뚫린다면 대구는 그대로 적의 수중으로 넘어갑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독립한 지 2년밖에 안 된 대한민국이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미군은 그 경우를 대비하여 밀양 지역에 저지선을 설정했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북한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밀양은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들이 일본 또는 자국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철수 시간을 버는 개념의 저지선이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생각에 생각을 더할수록 이 다부동 전선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이곳은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다면 미군의 막대한 지원도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곳은 지켜야 한다’라고 결심했습니다. 다부동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밀고 밀리는 싸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그는 권총을 빼 들고 적들이 넘어오고 있는 산봉우리를 보면서 앞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부대원들이 앉아있는 대열 한가운데를 가르면서 뛰어나갔습니다. 그가 대열의 가장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대원들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에서 함성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투는 시작되었고 기적의 승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부하들이 기적의 승리를 만들었다고 했지만, 사단장이 앞장서서 싸우는데 어느 누가 꽁무니를 뺄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8월 23일 새벽 2시 야간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유학산 837고지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렇듯 국군 1사단은 장교 부사관, 병사들이 투혼을 발휘하여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의 사상자 1만여 명, 적군 사상자 1만 7,500여 명을 기록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국군에게 자신감과 힘을 실어주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지켜낼 수 있다는 걸 일깨워 준 다부동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진 이런 자기 희생정신이 바로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소련이 몇 년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평화적 수단으로만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국가는, 머지않아 다른 국가에 흡수될 것이다’ 리처드 닉슨의 말을 상기합니다. 이 땅은 백선엽 장군 같은 선열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나라입니다.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신 차려 호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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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독서의 또 다른 방법
    지난 진천 여행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M 출판사 손 여사였습니다. 어느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으니 승낙 여부를 알려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스마트 폰을 열어 메일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책 읽는 문학관>이라는 오디오북 낭독 채널을 운영하는 분으로부터 온 메일이었습니다. 주로 다양한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오디오 드라마 형식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구독자 14만 명을 보유한 북 튜브 채널이라고 했습니다. 필자의 소설집 『에덴의 언덕』에 실린 ‘엄마의 일기’를 소개 낭독해도 될지 하락을 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서산타임즈 직원의 힘을 빌려 승낙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튿날 문학과 신앙의 깊이를 담은 목사님의 여정이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울림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며 정성을 다해 낭독하겠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며칠 후 유튜브 <책 읽는 문학관>을 검색했더니 정말로 ‘엄마의 일기’가 떴습니다. 바로 들어봤습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벌써 수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퇴고할 때마다 느꼈던 그때의 감성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가까운 성도에게 들어보기를 권했습니다. 긍정적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문득 <책 읽는 문학관>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영상을 생각나는 대로 지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자랑으로 비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중단했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난 2023년에 문체부에서 국민 독서실태를 조사한 결과 2022년 국내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이 1년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1년간 책 한 권이라도 읽었다는 성인은 겨우 43%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최근의 자료를 구할 수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이보다 더 좋아졌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추락하는 독서율의 원인을 살펴보면 영상 콘텐츠를 이용하는 비중의 증가와 스마트 폰 등을 통한 정보 습득 경로 다양화, 난독 인구 증가와 집중력 부족 현상 등 복합적 원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아니라도 나이가 들면 사실 책을 읽는다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필자도 책 읽는 욕심 하나만은 결코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지만, 몇 장만 읽으면 눈 아프고 집중력이 흐려집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다행히 이런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번 일로 책은 반드시 눈으로 읽지 않아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회 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4일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조회 수가 2만 5천 회나 되었습니다. 찾아보니 책을 읽어주는 다양한 채널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들의 수를 합하면 얼마가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문학을 사랑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국지 열 번을 읽은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말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독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려주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독서를 통해 타인의 삶과 지식을 살 수 있으며 독서를 통해 마음의 안정과 감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공한 대부분 사람은 엄청난 독서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장력이 좋고 발표를 잘하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잘하는 사람들은 모두 독서를 생활화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독서 하지 않으면 생각이 자기 일상에 한정될 위험이 있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되며 사고의 범위가 좁아질 위험이 있습니다. 문득 <책 읽는 문학관> 같은 유튜브가 독서의 또 다른 대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이책을 눈으로 읽는 것을 아날로그 방식이라면 온라인상 북 튜브는 디지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 이어령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디지로그가 바로 이런 건 아닐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종이책을 읽다가 감동이 오면 밑줄도 치고 명문장을 만나면 붙들고 명상하기도 하며 다른 곳에 옮겨 적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튜브는 유튜브대로 좋은 장점이 있습니다. 글보다 말이 더 영향력이 있듯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듣기는 단순노동과 병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제 책을 눈으로만 보지 않고 귀로 듣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필자 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독서의 더 없는 대안이라 생각됩니다./목사·시인·소설가·수필가 <gigic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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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7
  • 저축상을 선택한 군수
    공병선 전 서산군수의 이야기다. 공 군수 재임(86.3~88.2) 시절 서산군이 도의 세정분야실적 평가에서 종합대상이라 할 수 있는 ‘세수 실적 최우수상’과 부문상인 ‘저축상’을 받게 되었다. 도에서는 한 시군에 상을 모아 주는 것보다 나누어 시상한다는 방침으로 군에 둘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권고했다. 이에 군수는 머뭇거리지 않고 저축상을 선택했다. 세금징수 실적에서 최우수 성적을 올렸다는 것은 세금을 잘 받았다는 뜻이 되는데 심하게 표현하면 ‘고혈을 쥐어짰다’라고 판단되더라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저축상은 군민들이 아끼고 절약하여 저축하는 알뜰한 기풍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더 의미가 크고 군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한 고장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야구라면 MVP를 포기하고 골든 글로브쯤 받은 셈이었다. 공 군수의 이야기를 듣고 행정이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교훈을 얻었다. 세금이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법률에 따라 국민과 주민, 법인에게서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금전이다. 국가가 구성원인 국민 등에게 부과하는 일종의 ‘회비’라고도 할 수 있다. 납세는 국민의 5대 의무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고 보편적인 제도로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세금은 죽음과 함께 인간이 피할 수 없다. 심지어 죽은 뒤에도 따라다닌다. 그 때문에 세금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재원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주민 복지와 개발 사업 등에 투입한다. 따라서 세금 즉 재정이 없으면 마치 자동차에서 기름이나 전기가 없는 것과 같다. 세금은 대가 없이 거둬들이는 것이기에 제도가 정교해야 하고 공평해야 하며 매기고 거두는데 무리가 없어야 한다. 프랑스 루이 14세 때 재무장관이 ‘세금은 거위의 깃털을 뽑는 것처럼 거위가 비명을 덜 지르도록 하면서 많은 깃털을 뽑는 것’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 정부 고위 관료가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세종은 ‘정치를 잘하려면 세금 제도를 잘 만들어야 한다.’라며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에는 일정한 제도가 있다’라는 의미로 취민유제(取民有制)를 과거시험 문제로 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는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은 줄이고 대신 양반층과 땅이 많은 지주들의 부담을 크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세종과 영조가 성군으로 추앙받는 것은 이러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서산읍사무소에 세 번 근무하는 동안 주로 재무계에서 일을 했다. 담당업무는 모두 수입 사무였다. 읍민들이 찾아와 내는 세금을 받고 공무원들이 받아오는 세금을 정리하여 군 금고에 불입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공무원이 된 지 6개월, 재무계에서 일한지 1개월 만에 수납부 정리, 일계표 작성, 불입 절차 등 업무를 체계적으로 개선하여 읍면 재무계장들에게 수범사례로 발표하기도 했다. 체납세금 일제정리 기간을 제외하고는 주로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하루는 마을에 출장 나가 세금을 받으려는데 한 납세자가 현금이 없다며 달걀이라도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액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다시 찾아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냥 달걀로 받아왔다. 달걀꾸러미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이게 무엇이냐?”라고 물은 부읍장이 “세금이니까 금고에 넣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미심쩍게 생각하며 망설이고 있으려니 직원들이 다가와 “혹시 상했을지 모르니 확인해 보아야 한다.”라며 하나씩 들고 달걀 양쪽에 구멍을 뚫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빨아 먹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러면 공금을 횡령하는 것인데요.”라며 반 농담을 했다. 세금은 필자가 채워 넣었다. 돌이켜 보면 낭만이고 재미였다. ‘유흥음식세’라고 있었다. 다방, 음식점 등에 부과하는 세금인데 다른 세목보다 체납율이 높았다. 때로는 체납처분을 했는데 사실 값이 나갈 만한 압류대상물은 많지 않았다. 어느 음식점에서 압류한 ‘전축’을 읍사무소로 가져와 당직실에 보관했다. 전축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직원은 호기심에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노래를 듣기도 하였다. 지금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밀린 세금 때문에 갓 결혼한 며느리 앞에서 민망한 표정을 짓던 시아버지의 표정도 잊을 수 없다. 군청 고위 간부가 엽총소지허가 면허세를 체납했다. 아마 잊고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재무계장은 우편엽서에 빨간색 글씨로 인쇄된 독촉장을 보냈다. 모범이 되어야 할 간부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원칙대로 보내야 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기개가 잊히지 않는다. 세금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이고 정부의 중요한 정책 수단으로 늘 논쟁의 대상이 된다. 흔히 세금을 ‘혈세’, ‘고혈’, ‘세금 폭탄’과 같은 표현처럼, 세금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공자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고 했다. ‘호랑이보다 가혹한 세금이 더 무섭기 때문’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공 군수는 이 고사성어를 의식했을까? 문득 공감 가는 명분을 선택한 공 군수의 의식과 지혜롭게 일한 방식을 떠 올린다./전 서산시 부시장 <ka12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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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7
  • 진천을 딛고 오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충청북도 진천을 다녀왔습니다. 서산타임즈의 대표를 비롯한 임직원과 운영위원회, 지역기자회, 시니어 기자들의 화합대회였습니다. 서산타임즈의 초청으로 필자도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진천은 이미 2년 전에 다녀왔습니다. 여행은 꼭 새로운 곳만 가는 건 아닙니다. 여행 목적지도 중요하나 누구와 함께 하느냐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신문사에 도착하니 이미 여러분들이 와 계셨습니다. 낯이 익은 분들도 있지만, 처음 뵙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7시 반, 관광버스는 이들을 태우고 충북 진천을 향해 떠났습니다. 진천 농다리 생태문화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었습니다. 2년 동안 참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건 인공폭포였습니다. ‘생거진천’이라 쓴 글자 밑으로 하얀 물줄기가 비단 폭처럼 펼쳐져 물보라를 일으키며 햇빛에 반짝였습니다. 농다리 옆에 부교도 보였습니다.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농다리를 건너 용고개를 넘어 초평호로 향했습니다. 호수 위로 출렁다리가 보였습니다. 2년 전에는 없던 다리였습니다. 호수 주위로 데크로 만든 올레길 생겼습니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작년 2024년 5월에 출렁다리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농다리를 중심으로 4.8 Km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일행을 뒤로하고 나 혼자 빠른 걸음으로 걸었습니다. 그래야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이 보고 생각하고 사진을 남기려는 욕심에서였습니다. 아니 또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운동도 겸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입니다. 초롱길 데크 길을 걸어가는 중간중간에 휴식 공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팻말에 ‘힘내세요’라고 쓰여있고 또 다른 팻말에는 ‘많이 힘들었구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삶에 지쳐 비틀거리는 서민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로 달래주는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미르 309 출렁다리에 올랐습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습니다. 무성한 녹음이 호수에 잠겨있고 하늘까지 초록으로 물들어 호수 위에 떠 있습니다. 물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렀습니다. 생명은 초록입니다. 청춘의 색깔은 푸르름입니다. 힘이 솟았습니다. 보이는 동서남북의 풍경을 모조리 사진에 담았습니다. 출렁다리를 건너 기왕에 있던 생거진천하늘다리를 또 건넜습니다. 하늘다리에 ‘진천을 딛고 있다’란 글이 보였습니다. 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치 꿈속을 걷는 듯했습니다. 새소리, 바람 소리, 게다가 찰싹거리는 잔물결 소리는 세상에 어떤 음악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화음이었습니다. 올레길을 걷다 보니 휴식처에 진천에 얽힌 전설이 걸려있었습니다. 시간이 넉넉한 듯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용인 땅과 진천 땅에 생년월일시와 추석천이라는 이름도 똑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죽을 때가 되어 저승사자가 왔는데 진천 땅의 추석천을 데려갔습니다. 알고 보니 용인 땅 추석천이 대상자였습니다. 하늘에서 풀려난 진천의 추석천이 급히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벌써 자기의 시신이 묻힌 후였다고 합니다. 진천 추석천 혼백은 급히 용인으로 달려가 죽은 추석천의 몸으로 들어가 생환했습니다. 추석천은 진천 자기집에 갔습니다. 살아서 돌아왔다고 해보았지만, 얼굴 생김새부터 골격까지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 자기가 추석천이라고 우겨 결국 고을 원님에게 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원님은 조상의 내력과 가족 이름, 전답 규모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추석천의 말을 옳게 여겨 앞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 읽고 입속으로 생거세상(生居世上) 사거천국(死居天國)이라 중얼거리며 다시 걸었습니다. 곧이어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이 보였습니다. 고개를 넘어 농다리를 건너와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행을 기다리면서 전에 와서 지었던 ‘진천 농다리’라는 시를 소환했습니다. ‘농다리라니?/農다리일까?/Long다리일까?/아니, 아니/삼태기(籠)다리였네//천여 년 전/ 임장군이 놓았다는데/진천 땅에는/돌다리마저 문화제가 되었네//어느 곳엔들/세금천 같은 내(川)가/ 찾아보면 없을까?/어느 곳엔들/그런 큰 바윗덩이/ 찾아보면 없을까?//진천 농다리/두드리며, 두드리며/걷다가 묻다가/문화 창출은/찾고, 두드리는 자에게만/보인다는 답을 얻었네’ 우리 서산에는 자랑스러운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불상이 있고, 해미 읍성도 있습니다. 다만, 진천에는 우리 서산이 가지지 못한 문학관, 박물관이 있습니다. 조명희 문학관이 있고 충북 학생 교육 문학관이 있습니다. 이상설 기념관이 있는가 하면 진천 종 박물관이 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고장에도 이런 문학관이나 박물관이 세워질 것입니다. 농다리를 오가면서 문화 창출은 두드리는 자에게만 열린다는 걸 느꼈습니다. 함께 한 서산타임즈의 관계자들과 동행하면서 이들이 있기에 오늘날의 서산타임즈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초창기부터 이병렬 대표와 함께한 이들로부터 최근에 합류한 이들까지 하나같이 소명 의식과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성경에도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서로 협조하고 아낌없이 봉사하는 모습에서 서산타임즈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했습니다.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아침에 일행 중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되뇌어봅니다. “오늘이 내 생애 최고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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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0
  • 먹다
    ‘맛집’이라는 곳을 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건 메뉴야 어떻든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집의 성찬이라 할지라도 불편한 사람과 먹으면 도무지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에선 무얼 먹어도 맛있습니다. 엊그제 S 일행과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가 그랬습니다. S와는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특히 같은 취미로 활동한 후부터 더욱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식사하는 내내 즐거운 대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문득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정을 먹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사람끼리 만나 음식을 먹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말 중에는‘먹다’라는 말처럼 널리 쓰이는 말도 없을 듯합니다. 먹는 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뿐이 아닙니다. 나이도 먹는다고 합니다. 음식은 먹으면 건강해지는데 나이는 먹을수록 늙어집니다. 거절도, 피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먹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먹는 게 나이입니다. 마음도 먹습니다. 어쩌면 먹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게 바로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욕도 먹습니다. 밥은 배라도 부르지,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 밥맛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욕을 많이 먹으면 명이 길어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명이 길어진다고 해도 욕을 먹고 살고 싶지 않아 조심조심 살얼음판 위를 걷듯 합니다. 늙으면 귀를 먹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것저것 간섭하지 말고, 세상사 초연하라는 뜻입니다. 피해야 할 것은 귀먹은 욕을 먹는 일입니다. 대 놓고 먹는 욕이야 고치면 되지만, 귀먹은 욕은 알지도 못합니다. 대개 나대고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귀먹은 욕을 먹습니다. 더위를 먹습니다. 지구 환경 변화로 우리나라도 아열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에어컨 없이는 여름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노년이 되면 더위를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초등학교 3학년 때 정월 대보름날 담임선생님께 더위를 팔았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보면 너무 철없었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신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또 먹는 게 있습니다. 겁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에서 밤거리를 마음 놓고 다닐 수 없다고 합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겁먹지 않고 밤거리를 활보할 수 있으니 참 다행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애도 먹습니다. 속이 상하도록 심하게 어려움을 겪는 걸 말합니다. 산업 시대,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필자 같은 세대는 AI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인공지능 앞에 애를 먹습니다. 주문하는 것도, 여행할 때도 애를 먹습니다. 문맹이 따로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함을 시시때때로 느낍니다. 나쁜 건 뇌물을 먹는 것입니다. 뇌물을 먹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발붙이지 못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뇌물은 주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반드시 탈이 나야 합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걸 똑똑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독한 건 말아먹는 겁니다. 뇌물 먹기 좋아하는 탐관오리는 사회를 말아먹고 어리석은 자식은 집안을 말아먹고 탐욕의 경영자는 회사를 말아먹고 하류 정치는 나라를 말아먹습니다. 필자 같은 기독교인들은 꼭 먹어야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먹는다는 건 하나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먹어 그분의 가르침이 우리 몸 안에 들여야 합니다. 문득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라던 홍수환 선수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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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3
  • 달리기, 어떻게 뛰어야 하나 –자세편 -
    요즘 주변을 보면 달리는 사람이 많고, 그만큼 취미 생활로 달리기를 선택하는 사람도 많다. 달리기는 결코 쉬운 운동이 아니다. 장기간 오래 달리기를 하다 보면 절제와 인내를 배우게 되고, 고통 이후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자연스럽게 마라톤이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오래달리기 또는 마라톤을 하려면 단순한 의지뿐 아니라 지식과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는 운동을 시작한 지 13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등산을 하다가 산에서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트레일 러닝으로 이어졌다. 트레일 러닝은 짧은 보폭과 앞꿈치 사용을 기반으로 흙길을 천천히 달리는 운동으로 일반 마라톤보다 충격이 적어 상대적으로 편하게 달릴 수 있다. 반면, 일반 마라톤은 딱딱한 포장도로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허리, 무릎, 발목에 많은 충격이 가해진다. 그로 인해 오랜 훈련을 반복할수록 누적된 충격으로 인한 부상 위험이 높아진다. 따라서 마라톤을 하려면 무엇보다 바른 자세로 뛰는 것이 중요하다. 바른 자세란, 몸통을 곧게 세우거나 약간 앞으로 기울이고, 가슴을 내민 상태에서 거의 바로 선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자세에서 무릎을 들어 올린 후 발이 바닥에 닿을 때는 무릎과 발목이 굽혀진 상태여야 하며, 발이 닿는 위치는 몸의 중심 또는 약간 앞쪽이 되어야 한다. 발이 중심 가까이 닿을수록 체력 소모는 줄어들고, 반대로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체중을 지탱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충격 부담도 증가한다. 따라서 훈련을 통해 발착지 위치를 몸의 중심에 가깝게 유지하는 것이 체력 보존과 부상 방지에 중요하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는 무릎과 발목 관절의 각도도 핵심이다. 두 관절이 잘 굽혀진 상태에서 사뿐하게 착지해야 하며, 특히 발목 관절이 부드럽게 꺾여야 다리 전체에 충격이 덜 전달된다. 이러한 착지자세가 되지 않으면, 다리와 무릎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고, 결국 체력 소모와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착지 후 뒤로 찰 때 발 앞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체력이 저하되거나 호흡이 거칠어지면 무의식적으로 앞발에 힘이 들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지속 시 근육 과사용과 부상으로 이어지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달리기에서는 호흡도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실제로는 들이마시는 것보다 내쉬는 호흡이 훨씬 더 중요하다. 호흡 생리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안정된 상태에서 호흡할 때는 대부분 폐의 상부와 중부만 사용하고, 하부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숨이 찬다고 해서 크게 들이마시면, 폐의 상·중부만 과도하게 사용되고, 그에 따라 호흡근의 부담도 증가한다. 호흡근을 편안하게 하고 폐의 하부까지 활용하기 위해서는 내쉬는 숨을 길게 유지해야 한다. 내쉬는 호흡을 끝까지 하면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폐의 일부까지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 있고, 그만큼 더 많은 신선한 산소가 폐로 유입된다. 결과적으로 우리 몸은 더 효율적으로 산소를 흡수하게 되고, 체력 유지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호흡 방식은 흔히 복식호흡이라고 하며, 복부 근육을 활용하여 호흡을 조절한다. 복식호흡은 호흡장애 환자에게도 교육되는 표준 호흡법으로, 에너지 소모가 적고 지속 가능한 호흡 방식이다. 빨리 달릴 때 숨이 차오르면, 먼저 크게 들이마신 후 최대한 숨을 내쉬는 반복적인 호흡 패턴이 효과적이다. 처음에는 팔, 어깨, 다리가 저려오는 느낌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근육 긴장이 풀리고 호흡이 점차 안정된다. 또한 숨을 내쉴 때는 입을 크게 벌리지 말고 살짝만 열어 내쉬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폐에 양압이 형성되어 폐 활용량이 증가하고, 횡격막이 내려가면서 공기 유입량도 함께 늘어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더 안정된 호흡, 더 긴 호흡 지속력, 더 빠른 달리기 능력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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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3
  • 영월을 찾아서[3] 내 고장 서산을 생각합니다
    강원도 영월 하면 떠오르는 또 사람이 있으니 바로 방랑시인 김삿갓입니다. 영월에는 그의 유적지에 무덤이 있고 주거지가 있고 김삿갓 문학관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그의 본명은 김병연(1807-1863)입니다.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 난 때 난을 평정하지 못하고 항복함으로 역적으로 몰립니다. 그의 아버지는 멸족의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곡산에 갔다가 2년 후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자 귀향하지만, 화병을 얻어 돌아가십니다. 어머니는 주변의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어린 김병연 형제를 데리고 광주로, 이천으로, 가평으로, 평창으로,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합니다. 김병연은 16세 때 영월 향시를 보았습니다. 하필이면 그날의 시제가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선천 부사 김익순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글로 장원급제합니다.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넌 구천에도 못 가며,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라. 네 치욕은 우리 동국 역사에 길이 웃음거리로 남으리라!’(나무위키) 기쁨도 잠시, 집에 돌아온 후 김익순이 자기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처자식을 남겨둔 채 그는 방랑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전국을 떠돌던 김삿갓은 1863년 57세의 나이로 전남 화순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김삿갓 문학관을 관람하는 사이에 먼저 그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입구 작은 공원 주변으로 김삿갓 시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어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묘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묘 옆에는 ‘시선난고김병연지묘(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 쓴 돌비석이 서 있고, 자빠질 듯한 두 돌기둥이 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김삿갓의 묘는 영월 향토 사학자 고 박영국 선생이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려 보았습니다. ‘아들이 찾아와도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이젠 하릴없이 묘지에 갇혀 꼼짝 못 하십니다. 이 후배 문안드립니다.’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다 보니 생가를 찾아가는 표지판이 보였고 입구에서 1.8 Km 라 표시되어있습니다. 포장된 길을 걸어가다 가파른 언덕길이 나타났습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도로 아래 계곡으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낭랑했습니다. 김삿갓 박물관에 들어섰습니다. 삿갓을 쓴 그의 모형이 기다렸습니다. 모형 옆에 앉아 기념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시, 김병연 일가 가계도, 전국을 떠돌아다닌 방랑 여정의 지도도 있었습니다. 곳곳에 새겨져 있는 그의 시는 세상을 조롱하기도 하고 막대기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눈으로 읽으면 점잖은 글이 되지만, 입으로 읽으면 지독한 욕이 되는 글도 보입니다. <書堂來早知 내 일찍이 이 서당을 알고 찾아왔건만, 房中皆尊物 방안엔 모두 높은 분들 뿐이고, 生徒諸未十 학생은 모두 열 명도 안 되는데, 先生來不謁 선생은 찾아와 보지도 않네.> 세상인심이 보였고 뜬구름 같은 인생의 허무함도 보였습니다. 역사는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억울하고 서럽게 살다 간 영혼은 반드시 위로하고 한을 풀어 준다는 걸 여기 영월 땅에 와서 알았습니다. 영월은 비운의 땅, 슬픔이 깃든 땅이라 생각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날씨만큼 착각이었습니다. 거주인구의 열 배가 넘는 외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고장이었습니다. 날씨는 쾌청했고 사람들은 넘쳐났습니다. 식당마다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땅이었습니다. 내 고장 서산을 생각합니다. 하늘길, 땅길, 바닷길 훤히 뚫린 천혜의 땅입니다. 알프스 그림 같은 서산 한우 웰빙 산책로가 있고, 6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해미읍성이 있습니다. 무학대사의 혼이 깃든 간월암, 여기에 우리의 꿈 ‘청춘 예찬’의 민태원 생가가 복원된다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관광 자원이 될 것입니다. 강원도 영월을 다녀와서 역사는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편이란 것도 알았습니다./목사·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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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7
  • 영월을 찾아서 –2-
    단종, 그리고 세조, 또 한 사람 엄흥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사후가 궁금했습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고 억울하게 죽었으나 200여 년이 지난 후 1698년 숙종 24년에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왕위가 복위되었습니다. 1967년부터 영월에서는 단종제를 시작하였으며 1990년부터는 단종문화제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후손들로 그 넋을 위로하고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있었습니다. 한편 세조는 어떨까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의 권력 찬탈을 옳게 보지 않습니다. 그가 이룩했던 여러 치적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안정이나 과거제도 개선 또는 불교 진흥 같은 치적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오직 ‘세조’ 하면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왕이 되었다는 비정한 숙부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역사는 냉정합니다. 조선 최대의 비극인 계유정란(癸酉靖亂)의 장본인으로만 기억합니다. 위선피화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달게 받겠다며 삼족을 멸한다는 지엄한 왕명을 거역하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고 벼슬마저 버리고 숨어 지냈던 엄흥도. 역사는 이런 의로운 사람을 잊지 않았습니다. 단종하면 엄흥도가 떠오르고 그의 의로움을 후세는 기억합니다. 그는 숙종 11년(1695년)에 육신사에 배향되었으며 영조 대왕 때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습니다. 순조 33년(1833)에는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에는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고 합니다. 잠시 왔다가는 게 인생입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했습니다. 단종, 세조, 그리고 엄흥도. 지금도 여전히 그 같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역사는 말합니다. 어떤 이름으로 기록되고 싶은가? 영월 곳곳에는 단종의 자취들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영월에서는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단종 문화제를 열고 있습니다. 올해 58회째라고 합니다. 장릉은 단종의 능입니다. 장릉을 찾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정순 왕후선발대회에 출전하는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이들과 잠시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25일 단종 문화제 때 선발대회를 연다고 했습니다. 정순왕후는 어떤 인물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녀는 단종 2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단종이 열두 살, 정순왕후는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단종이 폐위되고 정순왕후도 폐서인이 되어 70여 년 동안 홀로 살다가 중종 8년, 노년에 복권되어 82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영월에서는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왕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순왕후 선발대회’를 열어 그 정신을 기린다고 했습니다. 정순왕후가 환생하는 날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비운의 왕 단종은 겨우 16년(1441~1457)을 살다 갔습니다. 세조는 그보다 세 곱절 더 많은 51년(1417~1468)을 살았습니다. 억울하게 살다 간 단종은 비운의 땅 영월에서 대대로 그 영혼을 위로받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조는 이 나라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불의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의리의 삶을 살다 간 엄흥도는 자손들이 복 받고 그 의로움으로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先被禍 吾所甘心).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청령포에 가면 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치 엑스트라 같은 사람, 바로 왕방연입니다. 그는 단종의 사약을 전하는 금부도사였습니다.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으로 전락한 단종에게 나아갔으나 차마 사약을 전할 수 없어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그곳에서 심부름하던 사람이 대신 사약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나와 있던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라는 시조. 사약을 전하고 돌아가다 냇가에 앉아 지었다는 왕방연의 시조입니다. 서강 앞 자갈밭 위에 앉아 잠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왕방연의 마음을 헤아려 봤습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야 하는 일도 많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맹종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저 엑스트라로 살다 보면 그렇습니다. ‘너도 그렇다’ 왕방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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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0
  • 대학병원 연계 진료를 위한 서산의료원 활용법
    작년부터 시작된 대학병원을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서산시민들의 걱정이 깊다. 서산에는 도에서 만든 서산의료원이 있다. 서산의료원을 잘 이용한다면 대학병원을 이용하기에 여러 면에서 유리할 수 있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점은 필요한 검사 시간의 단축이다. 어디가 아파서 서울이나 천안에 있는 대학병원을 바로 간다면 일단 진료예약이 어렵다. 진료예약이 된다고 하더라도, 필요한 검사 예약을 잡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서산의료원을 이용한다면, 대학병원에 비하여 진료 예약이 매우 짧다. 하루나 이틀 안에 진료를 볼 수 있다. 또한 필요한 검사도 당일내지는 수일 안에 가능하다. 피검사와 초음파 검사, 심지어 CT나 MRI도 빠른 검사가 가능하다. 대학병원에서는 한 달 이상이 걸릴 수 있는 검사의 예약도 빠르면 당일, 길어야 수일 안에 가능하다.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서, 필요한 검사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다. 요즘은 대학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는 암환자들의 경우, CT, MRI, 초음파검사를 서산의료원에서 하고 오라는 의뢰도 많이 들어온다. 대학병원에서 의뢰한 검사를 한 후, 영상과 검사 결과를 복사해서 가져가시는 환자분들이 많다. 처음으로 서산의료원을 이용하시는 경우에도, 서산의료원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에는 의뢰서를 써서 대학병원으로 가게 된다. 아무래도 대학병원을 바로 갈 때 걸리는 여러 검사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다. 응급상황에서도 서산의료원을 이용하면, 서울이나 천안의 대학병원을 바로 가는 것보다 많은 이점이 있다. 대도시에서는 응급실 뺑뺑이가 뉴스에 많이 나온다. 서산의료원 응급실은 응급실 뺑뺑이가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서산의료원 응급실에는 현재 10분의 응급의학과 전문의 선생님들이 최선의 응급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의 치료는 응급실이나 서산의료원에서 제공한다. 서산의료원에서 치료하기에 어려운 위중한 경우에는 최대한 빠르게 수용이 가능한 상급종합병원으로 전원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서산의료원에서는 작년에 새로 오신 외과 이병찬 과장이 유방암 수술을 하고 있다. 이병찬 과장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유방외과 임상강사를 하였으며, 경찰병원 외과전문의로 일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은 실력 있는 외과 전문의이다. 대학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예약이 밀린 경우에, 서산의료원에서 치료가 가능할 경우 유방암 수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로 인하여 많은 의료서비스가 필요해지는 상황이다. 도에서 만든 병원, 충청남도서산의료원은 서산시민을 위해, 충남도민을 위해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충청남도 서산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이용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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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0
  • 공무원은 ‘보초’다?
    6.3 대선과 맞물려 국민의 시선은 여기에 쏠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지만, 최근 한 통신사 해킹 사고와 관련하여 가입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개인정보 유출 염려와 몰래 자기 이름으로 대출받는 금융사기 걱정이 크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한은형은 해킹 사고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유심칩을 갈게 된 경위를 시간대별로 글을 썼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아침부터 대리점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보며 11시 30분 그 줄에 합류했다. 오후 1시 반에 번호표를 받고 그늘도 없는 곳에서 기다렸다. 3시간 20분 만에 드디어 유심칩을 교체했다. 버텨서 해냈다. 하지만 뭘 해냈나? 내가 유심칩을 교체해서 얻은 이익은 없다. 겨우 현상을 유지했을 뿐이다. 미미한 안심을 얻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현상 유지’ ‘미미한 안심’이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긴 시간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며 고작 해 낸 일이 무엇을 얻거나 이룬 것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한 것에 대한 소감을 실감 나게 썼다. 하지 않아도 될 일에 공연히 에너지를 썼을 때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뜬금없이 ‘공무원은 보초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공무원이 보초라니? 옛날 낮과 밤, 평일과 공휴일을 구별하지 않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무실을 지켜야 했던 시절에 길든 인식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탓도 크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서도 그냥 ‘5분 대기조’ 상태로 말이다. 요즘 기준으로는 너무 뒤떨어진 행태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당연하듯 그랬다. 의문을 품지 않았다. 보초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거나 어떤 결과물을 내놓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근무 중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하여 보초가 놀거나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리를 뜨거나 다른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된다. 뚫리면 큰 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민원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민원실을 비울 수는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상황이 없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직원이 밤을 지새우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냥 논 것인가? 당직원은 없어도 되는가? 평온하더라도 상황을 파악하고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다.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이 24시간 대기하는데 화재나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근무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 언제라도 필요할 때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믿음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보초론’을 유지한다. 한편, 국민은 공무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손과 발을 움직이며 무언가 하는 모습과 결과를 바란다. 성의 있는 자세를 원한다. 가령 민원인은 기다리고 있는데 공무원들이 모여서 잡담이나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릴없이 앉아 있거나 지루한 모습을 보인다면 불만을 느끼게 된다. 심리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보다 길게 느껴진다. 때로는 별것 아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시대는 공무원의 의식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공무원법과는 별도로 공무원으로서 지향하는 선언이고 추구하는 규범으로 ‘공무원 헌장’이 있다. 1980년 처음 제정된 ‘공무원 윤리헌장’은 공무원들은 암송해야 했다. ‘이 생명은 오직 나라를 위하여 있고, 이 몸은 영원히 겨레 위해 봉사한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헌장은 ‘충성과 성실은 삶의 보람이요 공명과 정대는 우리의 길이다’라고 이어졌다. 마치 비장한 지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2016년에 ‘윤리’가 빠지고 ‘공무원 헌장’으로 개정되었다. 새 헌장은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며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며 ‘창의성’, ‘전문성’, ‘다양성’ 등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게 고쳤다. 타율성에서 자율성으로 바뀐 것이다. 아울러 사생활 보장과 비효율적인 근무 문화를 개선하려는 제도적 조치도 마련되고 있다. 최근 부산 동래구의회는 근무 시간 이후에는 급하지 않은 업무 연락을 금지하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자연 재난이나 사회적 재난, 당직, 비상근무와 특별한 행사 때 사전 협의로 조율된 경우는 예외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상황이 바뀌고 근로와 사생활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해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규정이 마련되는 등 근무 환경에 제도적 변화가 일고 있다. 다만 이러한 추세가 공무원으로서의 본분을 흐리거나 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작가는 이번 해킹 사건으로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왜 힘들어야 하나’하는 의문을 품었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은 국민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든든한 버팀목이요 단단한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국민과 공무원 서로의 인식은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되며 공유되어야 할 것인가? 공무원은 언제나 보초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국민이 공무원을 보는 눈은 ‘할 일 없는 보초’로 인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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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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