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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08.04.1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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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두려워 말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기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한 위안이자 격려의 말이다. 그러나 산다고 하여 다 삶은 아니다. 삶답지 않은 삶은 두려워해야한다. 무엇이 삶답지 않은 삶일까. 이 물음에 명쾌한 대답을 해주신 이가 있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세종임금 즉위년까지 사셨던 선생의 삶은 우리나라 전 역사를 통하여 거의 유일한 스승의 길을 걸어가신 교훈이자 증거다. 참스승의 생애를 진리와도 같이 실천하셨다.

마흔여섯 나이로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기까지 그는 고려 말 정치 사회적 대 혼돈 속에서 바른 삶이 아니면 세상을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유일한 국립대학인 태학관의 성균박사로서 국가를 이끌어 갈 인재 양성의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과는 매우 잘 아는 사이여서 당시의 국가와 사회를 혼돈으로 몰아가는 원인이 이들에게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모든 일을 정치와 권력으로 해결하려 했고, 선생은 그 방법이 지닌 엄청난 불행을 간파했다. 일찍이 중국의 수많은 정치가가 주(周)왕조의 어진 정치를 이상으로 여겨 이를 실현하려 했으나 누구도 실천하지 못했고, 그 이유는 정치권력이 지닌 권모술수와 폭력과 전쟁에 대한 유혹 때문임을 선생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치를 무용지물로 여기거나 맞서 투쟁하는 방법도 좋은 것이 아니라 했다. 인간과 국가가 있는 한 정치는 꼭 필요했다. 선생은 다른 삶을 살기로 했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조금 뒤에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열고, 태조가 되고 태종이 되었다. 그들은 선생을 붙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존경받는 대학자의 위엄과 권위로 폭력정권의 잔혹함과 무지와 살상의 피 냄새를 가려보려고 했다. 임금 자리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그들의 간곡한 권유를 사양하고 고향 산골로 돌아와 학교를 열었다.

폭군이든 영웅이든 정치 권력자는 필요하고, 그들의 잘잘못으로 인민이 오래도록 고통받지만 권력이란 바람처럼 소멸하게 마련이며, 뒤에 남은 인민들은 또 새로운 시대를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인민들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안겨주고 인간답게 살게 하여 주는 것은 정치와 권력이 아니라 학문을 배우고 익혀 뒷사람을 가르치는 스승과 학교임을 그는 말했고, 실천했다. 학교에서 스승이 제자를 길러내는 일을 계속하는 한 독재자, 폭군, 영웅 그 어떤 자가 지배하더라도 세상은 인간으로 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스승 밑에서 공부했지만, 소년 시절 소학을 배운 박분(朴賁)과 청년이 되어 배운 양촌(陽村) 권근(權近)을 정신의 하늘로 삼았다. 그가 고향에 돌아와 시골의 평범한 선생님으로 산 지 십 년 뒤인 쉰여섯 살 때 양촌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때 그는 “옛적에 군(君), 사(師), 부(父)의 그늘에서 살고 있었기에 똑같이 섬겼는데, 이 세상에는 임금이나 아비를 위해서는 삼년상을 입어도 스승을 위해 복 입는 이는 없었다”면서 참으로 간곡하게 삼년상을 입으셨는데, 이는 스승을 위해 삼년상을 입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었다.

다시 8년 뒤에 박분 선생이 돌아가시자 또 삼년상을 입으면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 교육철학의 근본을 세우셨다.

그가 스승의 삼년상을 입는 동안 그의 제자들은 나물, 과일, 젓갈, 간장을 뺀 맨밥이나 다름없는 음식만 드시고 수척해지는 스승을 안타깝게 여기자, 스승은 육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닦아 세운 진리를 받들며 사는 것이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시대가 곤경에 처할수록 좋은 인재가 많이 필요하고, 그 인재는 훌륭한 스승과 좋은 학교에서만 길러지는 것임을 그가 보여주었다. 인재가 부족하고 시대가 어려우면 반드시 독재정치와 전쟁이 있었다. 정치는 그 권력 앞에 복종하고 아부하는 자를 키우면서, 이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모든 장점들을 싫어하는 것이 본질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떤가. 학교와 학력과 학벌은 무성하지만 학교와 학문과 스승의 본질은 왜곡되고, 더럽혀지고, 무시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삶답지 않은 삶이며,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정치의 소음이 봄비에 씻겨 사그라들고, 저 소나무 새순처럼 선생님들의 자긍심이 꼿꼿이 하늘을 향하는 계절이길 소망한다.<중앙측량설계사무소 대표/본지 자문위원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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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권의 세상 엿보기]||선생님들의 자긍심이 높아지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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