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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1.05.3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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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산면 동성리에는 4대째 옹기제작을 전수해 오고 있는 옹기공방 ‘갈산토기’가 있다. 50여  년 동안 옹기 만드는 일을 쉬지 않았다는 갈산토기의 주인장 방춘웅(70) 선생. 그의 고단했지만 의미 깊은 작업여정과 옹기에 대한 애정을 들어보기 위해 홍주신문 김혜동 기자가 만났다. <편집자 주>

고집스런 외길, 가족들이 큰 의지

갈산토기가 위치해 있는 갈산면의 동성리에는 현재 2개의 옹기공방이 위치해 있다. 그래서 옹기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방춘웅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 다섯 개 이상의 옹기공장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7·80년대의 플라스틱 붐에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해 지금은 두 개의 공방이 옹기마을의 명맥을 잇고 있다.

“가볍고 쓰기편한 플라스틱 용기들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옹기를 구워 식솔을 먹여 살리는 게 정말 힘들었었어요. 그런데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게 옹기 만드는 일 말고 또 뭐가 있었어야지......어려워도 참고 하는 수밖에. 정말 힘들었을 때에는 논에서 자라는 녹사풀이라는게 있는데, 그 풀을 뜯어다가 죽을 쑤어 먹기도 했으니까”

그의 지나온 시간에 대한 고백에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이 있었다.

“옹기가 잘 팔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작업환경도 지금처럼 좋은 것도 아니었지요. 지금처럼 좋은 잿물을 구할 수가 있나...나무가 흔했나...어렵게 만들면 플라스틱이나 광명단을 바른 값싼 공장제 옹기 때문에 팔기도 쉽지 않았지”

대규모의 전통 가마와 최신식의 가스 가마를 고루 갖춘 널찍한 옹기공방, 체험공방을 갖춘 지금의 시설에 이르기까지는 방춘웅 선생의 꾸준한 작업과 더불어 그의 일을 도와 옹기제작을 전수중인 둘째 아들인 방유준(34) 씨와 둘째 딸인 방유정 씨의 도움이 컸다. 특히 방유정 씨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옹기체험공방은 외지에서 찾아오는 가족단위 체험객들로 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각종 방송에도 소개된 바 있다.

“56년 동안 옹기를 만들면서 힘든 일도 참 많았고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보람도 크지만, 내 유일한 자랑이 있다면 아들, 딸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운 게 자랑이라면 자랑이에요. 요즘은 대학 보내는게 우스운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어디 그랬나. 옹기 만들어서 5남매 모두 대학까지 가르쳐 지금은 모두 제 각기 직업을 갖고 잘 살고 있으니까......”

방춘웅 선생의 요즘 가장 큰 고민이라면 공방 일을 돕느라 결혼적령기를 넘긴 아들, 딸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가업을 잇고자 젊음을 바치는 두 자녀를 바라보는 방춘웅 선생의 눈빛은 자애롭고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정성스레 불 지펴 일궈낸 명품옹기

방춘웅 선생은 서산시 운산면에서 태어나 운산국민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아버지로부터 옹기 만드는 일을 배웠다. 그 시절에는 운산면에도 옹기마을이 있어 옹기를 파는 장도 정기적으로 섰다고 한다. 서산이나 광천에서는 예부터 새우젓을 옹기에 담아 숙성시켰기에 그에 따른 옹기수요도 엄청났던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고향을 떠나 6년간 경기도 파주시 금촌에서 옹기작업을 계속했다고 하는 방춘웅 선생은 현재 부인도 금촌 작업장 시절에 만났다고 말했다. 이미 세상을 달리한 장인어른과 같은 공방에서 옹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둘째도 왠만하면 도자기를 만지는 여자와 결혼했으면 해요. 아무래도 힘든 작업이다 보니 서로 도와가며 일하면 고충이 조금은 덜 할 것 아니요”

파주에서 수원으로, 다시 안성으로 작업장을 옮기며 옹기작업을 이어오던 방춘웅 선생은 결국에는 좋은 옹기토가 생산되는 고향인 갈산면 동성리에 터를 잡고 전통적인 작업방식을 고수해 질 좋은 옹기를 제작해 오고 있다. 그의 노력의 부산물로 2005년도에 노동부로부터 기능 전승자로 선정됐고 충청남도 관광기념품 대전에 참가해 여러 차례의 입선과 공예품 대전에 특선을 차지해왔으며, 2008년 2월에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 38-1호로 등록됐다.

 

빛과 자연을 담은 생명의 그릇

전통옹기는 오로지 사람의 손을 거쳐 제작된다. 전통옹기제작을 시연하며 떡가래처럼 뽑아져 나온 옹기토를 뭉치는 방춘웅 선생의 거칠고 단련된 손이 그의 작업인생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발물레 위에 밑판을 넓게 펴고 떡가레 모양의 옹기토를 돌려가며 옹기벽을 쌓는다. 안공구레, 방망이, 수레, 도개, 물가죽 등의 도구를 이용해서 30여분 발물레를 돌리니 어느덧 1m 높이의 커다란 옹기가 모양을 잡아간다.

“예전에는 옹기장이 부인들은 물가죽(도자기의 손잡이나 꼭지, 전 따위를 만들 때에 쓰는 헝겊 조각)을 만드는 것이 일이었어요. 요즘에는 구하기 쉬운 것이 천이라지만 예전에는 목화솜 넣어서 일일이 누벼서 사용 했지요”

작업 중간 중간 예전 일을 떠올리는 방춘웅 선생은 최근 들어 일흔의 나이를 체력으로 실감한다고 한다.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된 옹기는 잿물을 입혀 문양을 그리고는 전통가마에서 구워진다. 기계식 가마에 나무가 아닌 가스를 때서 만들면 일손도 덜 들고 그릇이 깨질 일도 없다. 하지만 공기를 통하게 해 장맛을 깊고 진하게 해주는 미세한 숨구멍을 그대로 보존하려면 천연의 나무만한 재료가 없다. 작업능률이 좋을 때는 일 년에 서너 번 가마에 불을 지폈지만 요즘에는 일 년에 한번 정도 가마를 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전통방식을 버릴 수는 없다고 한다. 전통방식으로 만들어 낸 옹기야 말로 진정한 '생명'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불편하면, 옹기도 마음에 안 들게 나오지..." 50년 넘게 옹기를 만들어 오고 있지만, 여전히 흙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는 방춘웅 선생.

숨을 쉰다고 해서 생명의 그릇으로 불리는 옹기. 방춘웅 선생 고집스런 장인정신으로 갈산옹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홍주신문=김혜동 기자

◆방춘운 선생 약력

1943년 서산 운산출생

1954년 옹기작업시작

1980년 갈산토기 설립

2005년 기능전승자지정(제05-1호)

2007년 제37회 충남공예품경진대회 특선

2008년 2월 충남도지정무형문화재(제38-1호)

현 갈산토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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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맥을 잇는 옹기장…4대째 '외고집'||충남도무형문화재, 갈산토기 방춘웅 옹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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