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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쌓인 숲속에서

김풍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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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11.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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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을 떠나보내고 가을의 막바지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산에 오른다. 나무마다 오가는 세월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생을 준비하고 있다. 가을이 가도 겨울이 와도 그저 그런 듯 지내는 소나무는 눈에 보이지 않게 옷을 갈아입고 시치미 떼고 서 있다. 그런가 하면 다 버리고 오직 맨몸으로 혹독한 겨울 강을 건너야 하는 활엽수들은 울긋불긋 온갖 치장을 해서 나뭇잎을 떠나보내고 있다. 안타까운 이별의 눈물처럼 나뭇잎이 떨어지는 숲속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 더미 위에 앉아본다. 마치 양탄자에 앉은 것 같기도 하고 잘 마른 솜 위에 앉은 느낌도 든다. 조금만 움직여도 낙엽들이 속삭이는 소릴 듣는다. 오랜만에 만난 이웃 아주머니들의 소곤거림처럼 정겹다.

바람도 없는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나무 저 나무에서 동시에 떨어진다. 아무래도 겨울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짐작하고 서두는 걸까? 떨어지는 낙엽의 춤사위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시 한 구절이 읊조려진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의 승무의 끝 소절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어느 나비의 날갯짓보다 더 아름답다. 일어나 걸어 본다. 사각사각 낙엽의 밟히는 소리가 마치 음악을 듣는 듯하다. 박자를 맞춰 발걸음을 뗀다. 그러다가 문득 음악이 아니고 비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다. 밟히며 아파하는 소리다. 낙엽도 감각이 있는 걸까?

살아오며 내 중심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았다. 내 삶을 돌아보았다. 아내와 아이들 처지에서 보면 내가 생각해도 참 이기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글을 씁네 하고 문 꼭 쳐 닫고 대화 한마디 없이 하루를 보내기 일쑤고, 여기저기 모임이다, 교회 일이다, 하여 예고 없이 싸돌아다니고 있으니. 참 미안하기 그지없다. 그러고도 아무 말 없으니 마음이 편해서 그런 줄 알고 사는 내 모습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와르르 쏟아진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정적을 흔들었다. 이쪽저쪽에서 화답했다. 저들도 가을을 알고 있겠지. 산에는 널려있는 밤, 도토리, 알 수 없는 나무 열매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가을의 풍요를 노래하고 있었다. 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어디선가 숲속의 요정이 나와서 새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얼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잎들은 하늘의 파란 천에 형형색색 단풍으로 수 놓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단풍, 그들은 곧 땅에 떨어지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겨울 삭풍에 시달리겠지. 나무는 그걸 대비하여 아름다운 옷마저 다 벗어버리고 혹독한 시련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몸으로 고난의 행군을 준비하고 있다. 미래를 생각하는 지혜로운 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노후 삶을 준비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해본다. 재테크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우직하게 저축만 했지, 부동산에 묻어 둘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80년대 얼마나 조건이 좋았는가? 다른 사람 다 하는 그걸 외면한 결과가 지금 이런 모습이 된 것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어떻게 돈과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젊어서 한 기도가 적당히 째게 해달라는 기도였으니 달리 변명할 도리도 없다. 기도대로 되었으니 원망할 수도 없고 후회해본 들 소용없는 일이다. 요즘 와서 조금만 여유 있게 해달라는 기도도 가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살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다.

숲을 벗어나니 티끌 날리는 세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온갖 소음이 귀를 채운다. 평화가 어디 있을까? 우편함에 든 신문을 펼쳐 드니 지면엔 온통 네 편 내 편 갈라져 진흙탕 싸움판이다. 고운 언어는 실종되고 장밋빛 공약마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세상 아닌가? 그러면서 평화가 있고 정의가 있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게지. 행복한 하루였다. 숲속의 시간이. /김풍배(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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