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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6.06.2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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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가민가하면서도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하면 속아 넘어갈 때가 있다. 분명히 아부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참 듣고 있다 보면 그 말에 동화되기 일쑤이다. 보편적으로 보면 아부는 약자가 강자에게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그것이 때로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대방의 능력으로 비춰질 때가 있다.

어쩌면 인간의 유전자엔 아부라는 것이 새겨져 있고, 그 아부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유혹인지도 모른다.

사전에 보면 아부란 타인의 비위를 맞추며 듣기 좋은 말만하는 행동 또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을 보면 마음에도 없는 말로 사람들을 혼동시킨다.

진정한 아부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문적인 아부꾼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사람을 띄워 놓고 허영심을 자극하는 선동에 불과하다.

알고 보면 그것은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다시 말해 격이 없는 아부이며 진정한 아부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는 아부를 논하면서 사랑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여성을 유혹하기위한 남성들의 달콤한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여성들은 어리석게도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에 그냥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아부에도 급수가 있다는 것이다.

효과로만 따진다면 새빨간 거짓말로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상급이다. 다음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거짓말이라는 것을 뻔히 아는 뻥으로 기꺼이 속게 만드는 하얀 거짓말은 경쟁력으로 보면 하급에 속한다. 그래서 급수 있는 아부로 대접을 받으려면 아부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즉 아부의 핵심은 말하는 사람이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사실을 존중한다는데 있다. 그러면서 사실이 안 드러나도록 조심을 하고 그것이 아부로 밝혀지면 반성을 하면서 스스로 겸연쩍 해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아부에 대한 예의이고 상식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변종이 나타났다. 자신이 한 말이 사실이던 아니던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듣는 사람이 아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긍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아부에 대한 무례이다.

아부는 권력과 밀접하다. 듣는 사람이 분별력이 없으면 그 아부 때문에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있다.

계급 사회에서는 아부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는 대신 진실은 매장되고 그 아부를 믿는 사람은 결국 추락하기 일쑤이다.

속마음을 감춰놓고 상대방을 띄워주고 의견에 동조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기를 들어내고 친절을 가장해 행동하는 것은 잘못하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부로 인한 덫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아부에 맛을 들이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진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부는 거짓말이 가미되지 않으면 성립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거짓의 치명적인 적은 곧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진실이 더 우스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아부란 상대방을 띄워주고 칭찬할 때 칭찬만 하고 부탁은 하지 말라고 했다.

본인이 없는 곳에서 칭찬하면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찾아내서 아부하라는 조언이 인상적이다.

또한 윗사람에겐 자기주장을 절제하고 간접적으로 아부하되 아랫사람에겐 스스로 몸을 낮춰 아부하는 것이 최소한 아부에 대한 예의이다.

겸손한 태도로 남의 약점을 감춰주고 장점을 부각시켜 주는 것이 어쩌면 아부로서 인간관계에 윤활유가 될 수 있다.

서산타임즈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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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에도 급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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