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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07.06.3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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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이 열반하기 전 제자 아난다에게 참배할 곳을 알려주었던 4대 성지 중 하나가 바로 인도의 부다가야이다. 그 성지의 이름을 딴 우리지역의 가야산은 백제시대부터 불교의 명승지로 알려져 왔다. 100개의 암자가 숨어 있으며, 백제의 미소가 살아 숨쉬는 이곳에 불교의 중심지 보원사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그 규모만으로도 예전의 불교의 힘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보원사지에는 문화재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보원사지, 그 넓고 장대한 역사


보원사지의 정확한 창건 년도는 나와 있지 않다. 최초 발굴당시엔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짐작되었지만 1968년 6세기경 만들어진 금동불상이 발견됨에 따라 백제시대에도 절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만 할 뿐이다. 그렇지만 절이 현재의 터만큼 크게 중창된 것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 때다. 국사(國師)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이곳에서 입적했고 100개의 관할 사찰과 1000명의 승려가 기거했다고 한다.

절의 입구에 해당하는 당간지주(보물 103호)를 지나 현세와 부처세를 구분 짓는 개울을 건너면 그 넓은 터 곳곳에 발굴현장이 있다. 발굴부지 넓이만 1,300㎡이고 보원사지 지정면적이 102,866㎡이니

그 엄청난 넓이를 짐작할 수 있다.

 

보원사가 최초로 역사에 나온 것은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징의 탑비에 나온 “체징이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827)”는 기록부터다. 고려 최치원이 ‘법장화상전(904)’에서 보원사를 화엄종의 큰 사찰로 언급하고 있고 보원사 계단에서 경율시험을 봤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와 있고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보원사의 기록이 나오고 있다.


 

  5개의 보물, 수 많은 유물 유적


  보원사지에는 보물급 문화재가 5개나 있다. 석조(보물 102호)와   당   간지주, 5층석탑(보물 104호), 법인국사 보승탑(보물 105호), 보승비(보물 106호)가 그 주인공인데 석조는 일종의 물탱크로서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돌그릇이다. 장방형으로 길이 3.48m, 너비 1.75m, 높이 0.65m의 크기에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으로 절의 입구에 해당한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양식이지만 옛 백제지역의 특색도 보인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 기단 옆면에는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을 새겨놓았다.

 

 

법인국사 보승탑은 보승탑비와 함께 금당지 후편에 나란히 서 있는 팔각원당식의 부도이다. 원래 땅속에 뭍혔던 것을 1962년도에 조사하여 기단부의 구조가 밝혀졌다. 이 부도는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위에 8각혁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상륜부를 세운 형식의 부도이다. 기단부는 상ㆍ중ㆍ하대로 구성하였으며 하대석에는 안상을 음각하고 그 안에 사자상을 양각하였다.

법인 국사는 고려 제 4대 광종(949∼975)의 국사로 신라 효공왕 4년(900)에 태어나 광종 26년(975)에 보원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3년 후인 978년에 보승탑비가 세워진 것을 고려해볼 때 법인국사의 탑은 보승탑비 건립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고려시대 철불,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과 각종 유물유적들이 출토되었다.


위기의 보원사지, 그 청사진은?


잘 알려져 있듯이 보원사지와 가야산은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가야산 관통도로가 보원사 발굴현장 바로 앞을 지나가게 되어있어 이후 발굴현장의 규모축소와 소음, 진동 등 갖가지 피해가 예상된다. 내포문화권을 개발할 계획으로 또한 이곳에는 송전철탑을 세우고 골프장을 개발할 계획이 있다. 시민단체들의 반발로 도로와 골프장 건설계획은 중단되었지만 송전철탑은 이미 세워져 있고 앞으로도 더 세울 방침이다.

주민들의 생존권과 자연보호의 측면에서 어느 한쪽만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가야산과 보원사지는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서의 개발을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가야산지키기 연대(위원장 정범 스님)는 역사문화체험공간으로서, 생태환경의 공간으로서 가야산 개발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발굴이 끝나면 보원사를 복원하여 불교의 중심지로서, 하나의 멋진 관광지로서 가꿔나가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문화재 지킴이 - 보원사 정범스님


보원사지 옆에는 작은 사찰이 하나 있다. 보원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절의 주지스님이 바로 정범스님이다. 불교 성지의 기운을 모아들이는 이곳에서 정범스님은 가야산지키기 연대 위원장으로서 가야산 살리기 운동에 한창이다.

그는 철탑문제에 대해 “일제시대 작은 쇠말뚝 하나에도 괴로움 받던 우리가 산의 정기가 모여드는 꼭데기에 철탑을 세우고 있다”며 “가야산을 보존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어 “마치 여기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전력대란이 일어날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며 한전측을 비난했다.

또한 가야산 순환도로에 대해선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이 아닌 걸어서 문화를 몸으로 느끼는 길이 더욱 중요하다”며 도보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또한 “가야산만큼 중요한 불교유적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며 “대체할 수 있는 것과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잘 가려야한다”라고 말했다.

보원사의 위기를 인간의 위기와 함께 바라보고 있는 정범스님,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보원사를 지키는 지킴이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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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문화재탐방(5) - 보원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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