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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시 공직사회에 필요 한 것
    며칠 전 사소한 일로 칭찬을 하는 지인에게 “초등학교 이후 처음 칭찬 받아본다”고 농담으로 응수한 일이 있다. 그 말은 내게 칭찬받을 일이 별로 없다는 뜻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칭찬에 인색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칭찬에는 인색한 편이다. 사람은 칭찬과 격려를 받을 때 더욱 더 일을 잘하게 된다. 칭찬은 식물이나 짐승에게도 통하고, 인간의 뇌파에도 긍정적인 알파 파장을 일으킨다는 의학적 데이터도 있다고 한다. 1950년대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은 각자가 쓴 소설이나 시의 결점들을 가차 없이 서로 비평하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진 반면, 여학생들 중심의 또 다른 모임에서는 서로 혹평은 일절 피하고 좋은 부분만 칭찬했다고 한다. 10년 후 그들을 추적해 보니 여학생들은 대부분 훌륭한 작가가 된 반면, 위스콘신 대학의 문학 지망생들 중에서는 단 한 명도 뛰어난 작가가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해마다 적자내는 회사와 흑자 내는 회사의 원인을 각각 조사해 보니, 간부가 직원들에게 늘 호통을 치는 회사와, 상하 간에 서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회사의 차이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기업들이 칭찬 타임, 칭찬택시, 칭찬 포인트제 등을 운용하고, 교육 현장에서도 칭찬 스티커, 칭찬 통장, 학생 전원 표창제를 시행하는 등 칭찬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사그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 칭찬은 비용이 들지 않지만 큰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다. 쓰레기 문제로 골치를 앓던 도시에서 쓰레기 투기자에 대한 벌금 부과 대신, 쓰레기통 속에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칭찬의 말이 흘러나오게 했더니 깨끗한 도시로 변화되더라고 한다. 칭찬 한 마디가 사람의 일생을 바꾼 사례는 수 없이 많다. 글씨를 잘 쓴다는 아버지 친구의 칭찬에 용기를 얻었던 작가 뒤마, 미래에 뉴욕 주지사가 될 거라는 교사의 칭찬에 고무되어 그 꿈을 이룬 빈민가 출신의 로저 롤스, 어렸을 적 열등생이 “작가의 소질이 있다”는 교사의 칭찬에 고무되어 그 꿈을 이룬 앙드레 지드, 어릴 때 동네 골칫덩이가 “개성만 살리면 크게 될 거”라는 할머니의 칭찬으로 인생이 바뀐 빌리 그레이엄, 어릴 적 사고투성이 골목대장이 “군인 기질을 타고 났다”는 할머니의 칭찬에 눈이 확 뜨여 위대한 군인이 된 맥아더, 위대한 인물이 될 거라는 아버지의 칭찬에 고무되어 세계적인 사업가가 된 손정의, 평발의 핸디캡으로 실의에 빠졌다가 히딩크의 칭찬을 듣고 세계적인 축구스타가 된 박지성 등이 있다. 칭찬은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칭찬하는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자크 위즐이 자수성가한 100명의 백만장자들을 조사한 결과 사람들의 좋은 점만을 보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한다. 카네기 철강회사 잡부에서 US STEEL COMPANY의 사장이 된 챨스 슈와브는 격려와 칭찬이 성공 비결이었다고 밝혔다. 요즘 서산 공직사회에 비방ㆍ음해 소문이 들려오고 있다. 인사철을 앞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들려오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 내용도 업무와 상관없는 사생활 등을 주로 담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고발 측면보다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과 밀접하거나 경쟁상대를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정말 큰 문제다. 근거 없는 음해에 대해 뚜렷한 근절 방안은 없고, 그 피해는 애꿎은 시민들에게 돌아가고 있으니 그저 답답할 노릇이다. 특정인에게 ‘주홍글씨’를 씌워 마치 결격자인양 입소문을 퍼뜨리는 음해 세력들까지 등장하고 있을 정도니 서산시 공직사회가 정말 이래서야 되겠는가. 인사를 앞두고 자신의 승진이나 자리를 얼마든지 부탁할 수 있다. 또 특정인을 칭찬하거나 저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식의 평가도 가능하다. 이 정도면 인지상정 수준이다. 칭찬에도 적절한 타이밍과 기술이 필요하다. 과장되지 않고, 형식적이지 않은 칭찬, 관찰과 관심을 바탕으로 한 칭찬, 상대방이 듣고 싶은 칭찬, 적절한 시점에 있는 칭찬, 결과보다 과정을 언급하며 구체적으로 하는 칭찬, 부족한 것을 돌아보게 하는 칭찬 등이 효과가 클 것이다. 서산 공직사회가 서로서로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고 격려하고 박수쳐 주며 살아가는 훈훈한 조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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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5
  • 선거는 끝나고, 화합만 남았다
    선거는 끝났다. 지난해 12월 15일 예비후보등록을 시작으로 전국을 온통 야단법석으로 만든 지 120일만이다. 사활을 건 후보들에게는 하루하루 피 말리는 총력전이었을 게다. 하지만 유권자 입장에선 정신없고 시끄러운 4개월이었을 거다. 후보자들은 그동안 각기 국가와 지역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열띤 경쟁을 펼쳤고 승자와 패가가 결정됐다. 이제 후보자들의 경연은 끝이 났다.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졌다. 이긴 사람은 국회로, 진 사람은 각자 나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총선은 입법기관을 구성하는 국회의원을 주민들이 직접투표로 선출하는 것으로 주민 스스로 자신의 생활권을 확립하는 주권 행사이다. 주민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고 국가와 지역 발전의 동력을 찾는 축제장이기도 하다. 선거는 스포츠 경기처럼 선거법이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심판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경기 진행을 한다. 심판의 오심이나 편파판정이 나오기도 하지만 오심도 경기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다. 잘못된 판정에 대해 강력한 항의가 나오면 심판이 퇴장조치 할 수 있는 절대적 권위도 인정해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선거판은 심판의 권위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공정한 경기 진행을 하지 않아 오심도 잦고 더욱이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편파판정이 많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근대 정치사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탈당과 무소속 출마 등의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경기는 규칙을 준수하며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때 아름다운 경쟁으로 박수를 받게 된다. 하지만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각종 반칙이 난무하고 급기야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복해 재경기를 요청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각박한 선거, 그리고 게임을 바꿀 수는 없을까? 대안이 있긴 하다. 외국의 유명 온라인 게임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대표 온라인 게임에서 벌어지는 각박한 경쟁을 막기 위해 만든 규칙이다. 이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싸움(PVP)을 해도 소유한 아이템을 뺏거나 빼앗기지 않는다. 승자는 약간의 명예와 보상에 만족해야 한다. 패자라 해도 몇 분 정도의 부활 시간만을 보내면 그만이다. 이겨도 그렇게 얻을 것이 없고, 져도 잃을 게 별로 없는 것이다. 게임을 ‘게임’처럼 즐기는 것이다. 선거도 이럴 수 있다. 선거에 이겨도, 명예를 얻는 대신 국민을 위해 헌신해야 할 무거운 의무를 지게 하자. 지더라도 별다른 손해 없이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자. 그러면, 투표를 한 국민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번 총선에서도 상대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성 상호비방전과 흠집 내기 등 모든 수단이 동원되는 진흙탕 싸움이 전개됐다. 편 가르기와 불법선거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혼탁 선거가 여전히 숙이지 않았다. 선거 기간 동안 ‘내편, 네편’으로 갈려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서로 간에 적잖은 마음의 생채기도 생겼다. 심각한 선거 후유증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제 선거전은 끝이 났다. 지금까지 얼굴 붉히며 싸웠지만, 승패가 결정 나면 그 결과를 토대로 더욱 나은 발전을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승자는 더욱 겸허한 자세로 경쟁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야 하고 패자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아름다운 승복의 자세가 필요하다. 더욱이 경기에 패했을 때 결과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승복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패인을 ‘내 탓’에서 찾고 또 상대를 배려하고 인정하는 승복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는 패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해 주는 진정한 승자로 박수를 받을 것이다. 승자든 패자든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진정성으로 더 나은 지역발전과 사회통합을 이뤄나가는데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어찌됐든 선택은 끝이 났다. 이제 그 선택의 결과에 정치인과 유권자가 함께 화합을 이루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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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14
  • 선거철 제대로‘갑질’하자
    국회의원은 연간 1억4000만원에 이르는 세비를 받고 보좌관과 비서, 인턴까지 8명을 고용할 수 있다. 회기 중 불체포특권 등 특권만 200개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존경받아야 할 국회의원이 우리나라에서는 혐오의 대상이다. 일부 막말, 갑질에다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습성, 겉 다르고 속 다른 행태 탓이다. 국회의원을 비웃는 ‘국회의원과 코털의 공통점’이라는 유머는 압권이다. “뽑을 때 잘 뽑아야 한다. 잘못 뽑으면 후유증이 오래 간다. 지저분하다. 좁은 공간에서 뭉쳐 산다. 안에 짱 박혀 있는 것이 안전하다. 더러운 것을 파다 보면 따라 나올 때도 있다. 한 놈을 잡았는데 여러 놈이 딸려 나오는 경우도 있다.” SNS에는 마누라와 국회의원을 비유한 유머도 돌아다닌다. “마누라가 국회의원보다 나은 점은? 밥은 해준다. 국회의원이 마누라보다 나은 점은? 4년마다 갈아치울 수 있다.” 새 국회의원을 뽑는 20대 총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서산ㆍ태안 선거구에선 3명의 후보가 여의도행 티켓을 거머잡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다. 공천이 곧 당선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는 경선이 끝나면 선거분위기가 파장 국면이었지만 이번 선거는 막판까지 판세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경쟁구도가 가져다 준 긍정적인 결과다. 선량의 경쟁체제는 정치서비스가 높아지고 주민 이익과 지역발전에 순기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런데 유권자들의 반응은 너무 냉랭하다. 후보가 누구인지, 어떤 인물인지 도무지 알려 하지 않는다. 투표를 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도 망설이는 유권자들이 많다. 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이 원칙과 상식을 벗어난 정치행위를 일삼는 바람에 선거 무관심과 정치 혐오증이 촉발된 탓이 크다. 때문에 투표율도 역대 총선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선거에 무관심하면 기득권 세력만 어부지리를 얻을 공산이 크다. 묻지마 식 감성투표가 판세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선거는 검증이고 심판이다. 검증은 흠집 내기가 아니다. 잘못된 선택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다. 유권자들이 깨어 있어야 뉘를 솎아내고 정치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번 선거에는 새누리당 성일종, 더불어민주당 조한기, 무소속 한상율 후보가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다. 이들 후보자 경력과 재산, 병역, 전과, 학력, 납세 및 체납현황 등은 선관위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다. 정책과 공약은 선거공보에 실린다.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비교 평가할 수 있다. 기성 정치인이라면 서산과 태안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공약과 정책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배지 단 것에 만족하면서 대충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등도 관심 포인트다. 신인이라면 자질과 역량, 도덕성, 리더십 등이 포인트일 것이다. 서산과 태안에서는 역동적인 발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만큼 강한 정치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런 때일수록 역동성과 일당백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 역시 중요한 관심 포인트의 하나다. 선거 때는 ‘유권자-후보’는 ‘갑(甲)-을(乙)’ 관계가 된다. 하지만 후보가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 유권자는 을로 역전되고 만다. 유권자가 갑일 때는 선거철뿐이다. 4년의 단 한번이다. 이럴 때 유권자는 갑 행세를 제대로 해보는 거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뒤에도 유권자를 갑으로 대우해 줄 후보가 누구인지 천착해 보는 것도 검증 대상이다. 이번 총선이 아무리 늑장, 부실, 파행으로 얼룩졌다고는 하지만 지역을 책임질 정치리더가 대충 뽑혀선 안 된다. 코털처럼 뽑을 때 잘 뽑아야지 잘못 뽑으면 후유증이 오래갈 수밖에 없다. 이병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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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6
  • ‘서산 하늘길’을 꼭 열어야 하는 이유
    지난해 중국 북경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 서산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서 다시 북경 행 항공기를 타고 내린 시간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3시가 다되어서였다. 무려 8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현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 나갈 때 주 교통수단인 비행기를 이용한 시간은 고작 100분에 지나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20%수준이고 다른 일정으로 소비하는 시간이 월등하게 많았다. 서산에서 인천공항까지 가는 버스 탑승시간이 3시간 정도이고 보니 비행기 탑승시간의 2배가 조금 안됐다. 참으로 시간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요즘과 같은 ‘빛의 시대’에 비행시간이 2시간 이내인 중국에서 서산에서 출발해 하루에 업무를 처리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서산에서서 직접 북경을 운항하는 항공교통편이 만들어진다면 300분이 조금 넘는 시간이면 현지에 도착해 서둘러 일을 처리하고 당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상해 보면 지난해 북경 일정처럼 오전 6시에 서둘러 이동을 시작한다면 오전에 현지에 도착해 점심을 즐기고 또 서너 시간 업무를 처리하고 늦지 않은 오후 돌아올 수 있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구촌이자 하늘길이 우리에게 주는 큰 혜택이다. 최근 비행기를 이용하는 여객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2010년 8100만 명이었던 여객이 5년 만에 1억700만여 명으로 연평균 7.2% 증가하였으며 다른 교통수단과 비교해도 증가율이 가장 높다. 최근 5년간 항만이용자는 연평균 1.95% 늘어났으며 철도는 5,2%, 항공 이용객은 8.3%가 증가했다. 지구촌을 누빌 하늘 길을 여는 데는 국제공항 건설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물론 여객이 있고 항공물류가 있는 곳에 먼저 하늘 길을 열겠지만 미래 가치, 미래 수요에 대한 선제적 조치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산시는 지난해 12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서산 비행장 민항유치 타당성 용역비를 확정 하는 기적 같은 일을 성사시켰다. 이 사업은 당초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부 예산안에 빠졌다가 국회 심의 과정에서 되살린 것이기에 그렇다. 물론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기까지에는 이완섭 시장을 비롯한 관계공무원들의 노력도 컸다. 여기에 충남도 그리고 지역 정치권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힘을 보탰다. 서산 비행장 민항 유치를 위한 단초가 꿰어진 것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서산시가 지난해 2월 국회에서 개최한 서산비행장 민항유치를 위한 ‘항공사 초청 간담회’에서 이선하 교수는 서산비행장의 경우 2020년 내륙노선 4개(김해, 제주, 울릉도, 흑산도)로 47만명, 국제노선 2개(중국)로 11만명의 잠재수요가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 서산은 한중FTA에 의한 인적ㆍ물적 교류의 확대, 5천여 기업이 입주해 있는 충남 서북부 지역의 급격한 산업발전, 국가의 행정중심 타운인 세종시와 충남도청이 있는 내포신도시를 비롯하여,‘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해미읍성, 태안해안국립공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 유적지구 등 항공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요인이 즐비하다. 사실 개항 당시 서산보다 열약한 환경에 처해있던 청주공항도 개항 18년을 넘기며 여객 200만 시대를 열었고 영국의 국영방송 BBC에서 4억 달러를 들여 지은 터미널에 6개월 동안 단 한 명의 승객도 이용하지 않았다며 ‘유령공항’이라고 불리던 양양공항도 이젠 외국인들이 입국대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해안의 교통 허브가 되고 있다.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공항 건설과 항공수요 중 무엇이 먼저인지 참으로 무의미한 우문이다. 올 예산에 서산공항 건설타당성 용역비가 15억 원 확보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분명한 것은 기반시설이 확충되고 하늘길이 열린다면 사람이 모이고 물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경제도 윤택해진다는 이제껏 보아온 보편적 실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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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30
  • 아듀! 2015||데스크칼럼
    차가운 바람과 함께 을미년(乙未年) 한 해가 빠진다. 다사다난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파란 많고 곡절 많은 한해, 아쉬움과 회한이 큰 한 해였다. 저물어가는 한 해를 보내면서 즐거운 마음이 드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룬 건 없고 나잇살만 먹어가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서 해를 넘기기엔 너무 억울하다.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벌써 날은 저물고 한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있으니 어찌 아쉽지 않으랴. 세월은 흐르는 물 같다. 이 세월을 사는 인생도 한낮 찰나에 불과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나뭇잎을 한번 스쳐 지나가듯 그렇게 다가왔던 시간들이 이렇게 또 덧없이 지나간다. 생각해보면 세월무상, 인생무상이다. 세월이 왜 이리 빨리 흐르는 것일까. 그건 지구가 돌기 때문이다. 30~40대는 죽음에 대해 전혀 고려치 않았다. 그런데 50대 중반이 되고부터는 지인들이 뜻하지 않게 저세상으로 가는 걸 보게 될 때, ‘남의 이야기가 아니구나’하고 느끼게 되는 것은 죽음도 하나의 자연의 이치라고 할까? 아무 생각 없이 ‘돈’만 쫓으며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때론 죽음도 준비하면서 살아갈 때 훌쩍 지나간 세월에 대한 후회를 덜 하게 될 것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인류가 달력을 가진 이래로 수없이 반복해 온 행위이다. 인간에게 과거는 그저 지나버린 시간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지만 의미론적으로 보면 현재에서 과거로, 미래에서 현재로 흘러간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은 채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의 꿈에 의지하여 현재를 살아간다. 올해 한국정치는 그야말로 ‘갈등’과 ‘충돌’의 연속이었다. 바람 잘날 없었다. 마치 덤프트럭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형국이었다. 사회와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정치권의 싸움질은 국민들의 근심을 더했다. 국회는 여야 정쟁으로 예산안의 법정시한 내 처리에 실패하고 내년 4.13 총선을 위한 선거구획정 협상도 공전을 거듭하는 등 ‘식물국회’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여기에 새정치 안철수 의원이 탈당을 선언해 내년 총선을 4개월 앞둔 야권이 정계개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솔직히 올해 국내 정치는 눈만 뜨면 싸움판이었다. 얻은 것은 없고, 여야 모두에게 잃은 것뿐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때 약속했던 ‘국민 행복시대’, ‘대통합 정치’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국민 불안과 분열의 정치로 치닫고 말았으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이 적힌 ‘금품 메모’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파문을 일으켰고, 리스트에 오른 이완구 국무총리가 낙마한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한 고비가 지나면 더 큰 고비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올 한 해를 꽉 메웠다.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포함해 돌이켜 보면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것은 없고, 갈등과 상처만 남아 있다. 오죽했으면 교수들이 2015년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꼽았을까. ‘혼용무도’는 나라 상황이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는 뜻이다. 혼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이 합쳐져 이뤄진 말로 각박해진 사회분위기의 책임을 군주, 다시 말해 지도자에게 묻는 말이다. 2016년 새해 병신년(丙申年)은 붉은 원숭이의 해다. 병(丙)이 상징하는 색이 붉은 색이고 신(申)이 상징하는 동물이 원숭이이므로 이를 더해 붉은 원숭이로 지칭하게 되었다. 붉은 색은 ‘악귀를 쫓아내고 건강, 부귀, 명예’ 등을 상징한다고 알려졌다. 원숭이는 아주 재주가 많고 영리한 동물이다. 새해엔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국방 등 각 분야에서 모든 일이 영리한 원숭이의 지혜로 풀렸으면 한다. 그러나 시야를 넓히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고 우리 정치는 다시 지뢰밭을 걸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때일수록 지난 역사의 아픔을 거울삼아 유비무환의 자세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희망을 잃지 않고 힘을 모으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고 했다. 송구영신! 실의와 절망을 낙조에 실어 보내고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새해를 맞이하자. 그래서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청산하고 화합과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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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12-30
  • 건설업계 자본금 맞추기 현실화해야 한다||데스크칼럼
    연말을 맞아 필자 주위의 건설업자들은 요즘 실질 자본금을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몰려드는 대부업체들의 대출권유 정보와 늘어나는 업무에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건설업체들은 매년 연말마다 실질 자본금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할까? 이유는 국토교통부의 건설업관리규정에서 대표이사의 가지급금 등을 부실우려가 있다고 해 실질 자본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현행 건설업관리규정 중 신규 등록(추가 등록포함) 및 주기적신고시 적용하는 자본금 인정 기준은 불합리한 상태로 수년째 운영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하면 건설업의 주기적 신고시 등록기준의 충족여부는 신고하는 연도의 최근 3개년에 대해 확인해야 하며, 자본금의 경우 법인등기부등본상의 납입자본금과 정기결산일 기준 재무제표상의 실질자본금에 대해 확인해야 한다. 또한 직전 연도의 경우에는 실질자본금이 등록기준에 충족하더라도 가지급금 등 부실우려가 있는 자산을 차감하고 산정된 금액이 등록기준에 미달하면 재무관리상태진단보고서를 작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질자본금의 등록기준 충족여부 판단시 자본총계에서 추가로 가지급금 등 부실우려가 있는 자산을 차감한 후 산정된 금액으로 적격여부를 확인하도록 한 건설업관리규정상의 내용은 상위 법령인 건설산업기본법시행령에서 정의한 자본금의 개념을 명백하게 부인하는 경우로서 위법적인 요소가 있다고 판단된다. 여기에 주기적 신고시에는 3개년도중 직전년도를 제외한 2개년도는 가지급금 등을 자본금으로 인정하나 직전년도에는 부실 우려가 있다고 규정한 가지급금 등을 자본금으로 인정하지 아니하여 년도별로 규정 적용에 따른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은 년도별 형평성에 대한 문제점은 지난 2013년도 상반기에 전국적으로 실시중인 전문건설업체에 대한 실태조사에서 나타났다. 실질자본금은 기술능력과 달리 상시 확인이 불가능해 특정시점을 기준으로 한 자료를 활용해 등록기준 충족 여부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토교통부는 실태조사 대상업체들의 확인자료인 2012년도 재무제표 작성이 완료된 2013년도 4월에 이르러 부실자산을 차감하도록 하는 내용의 실태조사 지침을 발표하고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건설업관리규정을 준수하고 성실하게 건설업을 영위하고 있는 대다수 업체들이 영업정지 처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울러 건설업관리지침상의 규정이 상위 법령의 규정을 위반하지 아니한 경우라도 대다수의 건설업체가 법인 자본금의 일부를 가지급금의 형태로 대표이사에게 대여하고 있으며, 이를 상법(또는 세법)에서 자산으로 인정하는 현실과 상충되는 것이며, 또한 가지급금을 자산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라면 연중 계속해 불인정해야 하고 정기결산기준일에만 불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더욱이 국내 건설업체의 90%이상이 12월말일이 결산일인 관계로 매년 연말이 되면 연초에 대여한 가지급금을 상환하기 위해 일시에 많은 자금이 소요되고 있으나 담보능력이 부족한 건설업체들이 제도권의 금융시장에서 특정기간에 자금을 조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며, 행정처분을 면하기 위해서는 고액의 이자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보다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사채시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는 비합법적 금융시장인 사채업자들의 영업을 정부에서 앞장서 도와주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결국 실질 자본금은 제도나 규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상시 확인이 불가능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건설업의 신규 등록(추가 등록 포함) 및 주기적신고나 실태조사시 건설산업기본법시행령에서 규정한 '총자산에서 총부채를 차감한 자본총계'로 인정함이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만일 그러하지 아니한 경우라면 건설업종당 법정 최소 자본금을 1억원미만으로 대폭 축소하고 상시 보유하도록 건설산업기본법령을 개정함이 보다 현실적이라는 생각이다. 사채업자의 이익만을 보장하며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규정을 이용한 규제로는 부실업체의 퇴출이라는 정부 당국의 목표는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건설업관리규정의 실질 자본금 관련 규정이 개정돼 실제적으로 견실한 업체가 인정받고 건설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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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3
  • 지금 서산이 필요로 하는 것?
    데스크칼럼 이병렬 편집국장 사생결단의 당파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졌던 조선 후기 송시열과 허목은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자 사상가, 학자였다. 당시 송시열은 노론,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 말 그대로 최대 정적 관계였다. 어느 날 송시열이 중병을 앓아눕게 된다. 백방으로 용하다는 약을 구해 복용하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갈수록 병세가 악화하자 송시열은 마침내 자신의 아들에게 ‘의술’에 조예가 깊은 허목에게 처방을 부탁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허목은 기꺼이 응한다. 문제는 처방전에 독약 수준의 비상이 포함됐다. 허목을 믿지 못한 송시열 아들은 비상을 빼고 약을 달여 올린다. 좀체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아들을 불러 허목의 처방이 맞느냐고 추궁한다. 아들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송시열은 “허목은 용렬하고 비열한 선비가 아니라며 용서를 구하고 처방전을 다시 받아오라”고 호통을 친다. 새 처방전에 따라 송시열은 마침내 병석을 털고 일어나 정사를 돌보게 된다. 작금의 서산은 ‘서산비행장 민항 유치’, ‘서산바이오웰빙특구 건설’, ‘대산항 국제여객선 취항’, ‘당진-대산 간 고속도로 건설’등 각종 현안이 한꺼번에 겹쳐 어수선한 분위기마저 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서산시와 서산시의회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기자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비단 기자의 생각만은 아닌 것이 중론이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혹자는 서산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과정의 ‘성장통’이라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서산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극히 일부긴 하지만 마치 이를 즐기고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지역 분열을 조장하거나 획책하는 유언비어를 양산하며 벼랑으로 내모는 데 혈안이다. 앞서 언급한 송시열과 허목의 이야기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선 서산 발전에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힘을 모아 성공한 사례는 불과 얼마 전에 경험했지 않은가? 이완섭 시장과 김제식 국회의원의 ‘협업정치’는 정부가 예산안에 조차 끼워 놓지 않았던 ‘서산비행장 유치를 위한 타당성조사용역비’를 국회 본회의에서 과정에서 끼워 넣는 성과를 거두게 했다. 정부 예산안에 빠진 사업이 국회 심의 과정서 살아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서산시와 이 시장은 사업을 예산에 포함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여기에 김제식 의원 또한 지역 현안사업 예산확보를 위해 나름의 역량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같이 거대한 서산시 현안 사업 추진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개인감정이나 ‘정쟁’이 있을 수 없고 사회 지도층 인사는 물론 서산을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서산에 뼈를 묻을 시민이라면 진정으로 서산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제언일까. 이완섭 시장과 장승제 서산시의회 의장이 사심을 버리고 한자리에 모여 현 난국을 풀어갈 중지를 모으는 등 협력 관계를 구축하길 소망해본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서산의 불행을 원하고 안정을 바라지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극히 일부이겠지만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는 두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오만가지 해석이 판을 치고 있다. 예들 든다면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등의 얘기가 사실처럼 시중에 떠돌기 때문이다. 서산의 주인은 서산 시민이다. 건물 주인이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 건물을 관리를 포기한 건물로 판단하고 돌을 던져 나머지 유리창까지 모조리 깨뜨린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다. 발전 잠재력이 무궁무진해 희망찬 미래 도시로 불리는 서산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데 어느 누가 서산에 투자하고 살려고 할 것인가. 지금 서산이 필요한 것은 비난과 힐난의 돌이 아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온 진정한 애향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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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0
  • 서산나이 열세 살||데스크칼럼
    이병렬 발행인 겸 편집국장 지난 일요일 아침 일찍 산길에 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휘적휘적 걷는데 분홍 꽃이 활짝 핀 나무가 보인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지난 갈대 사이에 서 있는 개 복숭아다. 발길을 멈추고 꽃들을 살펴보는데 한 꽃잎에 이슬이 맑은 구슬인양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바람 탓인지 세월 탓인지 어느새 떨어진 이름 모를 하얀 꽃잎들은 꽃길을 만들고 있다. 초록은 점점 세상을 뒤덮고 있고 산은 꽃 산으로 변해가고 있다. 필자는 불혹을 훌쩍 넘겨 서산에 정착을 시작했다. 40여년을 넘게 강원도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서산으로 왔으니 나로서는 올 해가 서산나이로 열세 살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이 봄은 그 열세 번째 봄이기도 하다. 참 좋다. 세상 근심을 내려놓으니 봄꽃을 자유로이 볼 수 있고 잣나무, 청설모에게도 말을 건넬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걸 두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한다는 것이리라. 사람이 산다는 것을 반추(反芻)해 본다. 나는 지금껏 시간표가 인생인 줄 알고 살았다. “이거 마치면 다음에 저걸 해야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다음 승진을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조직이 요구하는 시간, 거기에 맞춰야 하는 나는 시간을 중심으로 이정표를 세우고 살았다. 공간보다 시간중심으로 살다보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는 늘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것이 되기 마련이다. 그저 미래가 중요해져서 현재의 삶은 철저히 무시되기도 하고 희생을 요구받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아님 바쁜 세상을 비켜나서인가 서산나이 열세 살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공간중심으로 살면 어떨까? 습관적으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한다. 시간중심의 사고이다. 그러나 시간 개념의 과거와 미래는 시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공간으로서만 존재한다. 과거는 남겨진 공간(형태와 기억)으로 존재하고 미래는 우리의 상상(뇌 공간)속에서만 존재한다. 과거는 현재가 지나간 궤적이고 미래는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충실한 것이 제대로 사는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 삶은 시간 그 자체이기보다 현재 내게 주어지는 기회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계획과 로드맵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이고, 우리가 늘 직면하는 기회를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되돌아보면 내 삶의 상당 부분이 순간, 순간, 시간에 매달려 살다보니 공간은 늘 타향 어딘가의 거기가 거기였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반복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향을 찾아 친구들과 어울린 적도 크게 없다. 바삐 세상을 산 많은 이들의 삶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 되뇌어 본다. ‘무엇’이 되겠노라, ‘무엇’을 해야 된다고 시간표만을 세워 놓고 살기보다는 매 순간 위치하는 ‘지금 여기’의 삶에 의미를 두고 ‘어떻게’ 이 순간들을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채울까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 아니겠느냐고. 서산나이 열세 살. 앞으로 언제까지 ‘지금 여기’를 맞이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여기가 얼마나 소중한가. 또, 지금 여기가 얼마나 감사한가.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에 함께하는 사람들, 일들, 짜증과 고민까지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 우리 모두 시간을 넘어 ‘지금 여기’라는 곳으로의 공간여행을 시작하자. 나는 내 제2의 고향 인 서산 여행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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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9
  • “왜 차가 없어요”||데스크칼럼
    이병렬 편집국장 기자생활 27년이지만 나는 자가용이 없다. 운전면허증도 없다. 앞으로도 면허를 따거나 차를 살 생각은 없다. 그동안 ‘신속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자가 왜 차가 없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번 기회에 그 이유를 밝히자면 이렇다. 환경문제를 생각해서라든지 그런 거창한 건 아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였다. 1988년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 발령받고 나니 차를 사라는 선배들의 권유가 있었다. 실제 그때 취재기자들은 대부분 차를 몰고 다녔다. 당시 내 월급은 50만 원 정도였다. 그 월급으로 어떻게 차를 사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월세로 10만 원, 겨울에 난방 겸 취사용 LP가스 네 통 가격이 10만 원인데…. 게다가 밥도 사먹고 술도 마시고 옷도 사 입고 친구도 만나고, 가끔 부모님 용돈도 줘야 하는데…. 결국 ‘촌지’라는 뒷돈을 적극적으로 챙기지 않는 한 불가하다고 판단했다. 그 무렵 우연히 영등포 청과시장에서 대부로 통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구에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시장에서 온갖 잡일을 하면서 일을 배웠다는 그는 몇 해가 지나고, 약간의 모은 돈으로 조그만 야채가게를 시작했는데 하루에 3시간만 자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돈이 모이면, 고향에 집안이 어려운 후배를 서울로 불러다가, 자신의 가게 옆에다 가게를 하나 내주고, 일도 가르치며, 장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다 돈이 모이면 또...그렇게... 이 분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한 달 매출이 약 20억 정도 되는데도 자가용이 없었다고 한다. 출퇴근은 자전거로 하고, 좀 멀리 가야할 때는 택시를 이용하고, 심지어 지방 출장 갈 때도 택시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런 분도 차가 없는데…. 월급 50만원 주제에... 그 후 한 호텔 신축공사장이 붕괴돼 7명이 숨지는 사고가 터졌고, 그 현장에 내가 택시를 타고 가장 먼저 도착함으로써 ‘기자의 신속성’은 차량 유무와 무관하다는 걸 입증할 수 있었다. 월급 100만 원이 넘은 후에도 차 없는 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터라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고 있다. 사실 좋은 점이 더 많다. 장거리 여행 땐 버스나 기차 안에서 미뤄뒀던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여유롭게 생각에 잠길 수도 있다. 술도 자유롭게 마실 수 있고, 주차할 곳을 못 찾아 뺑뺑이를 도는 수고도 없다. 서산에서 시청 부근을 지나다 택시를 기다리던 중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조규선 서산시장의 관용차를 얻어 타는 호사를 누린 적도 있다. 그리고 또 있다. 당시 변웅전 국회의원, 이창배 도의원, 이수영 과장(현재 복지산업국장), 오세호 시의원 등 수많은 사람과 동승한 적이 있다. 이게 다 내 차가 없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요즘도 그렇다. 밤늦게 야근을 하는 날엔 지인들이 기다리다 집에까지 태워다 주는 일도 있다. 차가 없어 누리는 호사에 그저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물론 차가 없으니 불편하거나 기분 나쁜 일도 있다. 우선 거리 곳곳의 불법주차가 우선 못마땅하다. 아파트 1가구당 1대의 주차공간을 ‘기본’으로 주는 것도 그렇다. 그렇다고 차가 없는 사람에게 관리비를 깎아주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자기 차가 있는 사람은 주행 중이든 주차 중이든 항상 주차 1면 공간(2.3× 5m 이상, 약 4평)만큼의 공용면적을 점용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처럼 부동산 욕심이 많은 나라에서 불법주차에 대해선 왜 이리 관대한지 모르겠다. 더 기분 나쁜 건 매일 차량 배기가스를 내뿜고 다니는 사람들이 길거리 간접흡연의 피해를 주장할 때다. 얼마 전 이런 만화를 봤다. 굴뚝에서 엄청난 매연을 뿜어내고 있는 화학공단의 길목에 ‘금연’ 표시가 붙어 있었다. 과연 담배연기가 자동차 배기가스보다 나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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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1
  • 서산의 ‘똠방각하’
    이병렬(본지 발행인) 1990년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방송 드라마가 있었다. 미니시리즈 ‘똠방각하’다. 최고의 시청률을 연일 경신하며 뜨거운 화제를 모은바 있다. 당시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거리는 한산했다. 순전히 이 드라마를 보기위해 사람들이 TV앞에 모여 앉았기 때문인데 그 인기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똠방각하는 최기인의 소설을 각색한 코믹스런 드라마다. 시골 좁은 바닥에서 안하무인으로 거들먹거리는 주인공을 통해 세태를 꼬집고 있었는데 주어진 직책을 완장에 새겨 팔뚝에 차고 무능력하지만 능력이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주인공의 무소불위 권력 휘두르기가 정말 기가 찼었다. 그 포악의 정도가 워낙 심하다 보니 드라마 방영이 막을 내린 이후 우리들은 되먹지 못한 행세를 하는 사람을 보고 ‘똠방 각하’라고 부르기도 했다. ‘똠방’이란 말은 실속 없이 덜렁거리고 다니거나 아무데고 아는 체하고 나대며, 머리보다 몸이 앞세우는 사람의 행동거지를 일컫는 말이다. 즉, 무능력하면서도 마치 자기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것처럼 행세하다 시쳇말로 ‘왕따’ 당하는 사람을 뜻한다. 더구나 이러한 똠방에게 완장이라도 채워주면 자기가 가진 권력을 마음대로 교묘하게 휘두르는 각하가 된다. 바로 똠방각하가 된다는 얘기다. 당시의 드라마에서 주인공 똠방은 보란 듯이 완장을 차고 그동안 억눌려왔던 동물적 본능을 그대로 자기의 행동으로 표현하며 오지랖도 넓게 이일 저일에 참견하고 다니면서 위세를 뽐냈다. 혹시 누가 자기를 몰라주는 것 같다고 생각되거나 어떤 일에 반대라도 할라치면 왼쪽 팔뚝에 찬 완장을 톡톡 치면서 자기가 누구라는 걸 과시하며 천방지축 입에 거품을 물며 날 뛰었다. 똠방은 완장을 믿고 설치다가 결국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는 것으로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당시의 시청자들을 매혹시킨 오래된 연속극 ‘똠방각하’가 문득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무려 25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곳곳에서 똠방각하들이 완장을 차고 날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완장을 차기위해 비열하고 치사한 언행을 일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도 내 주위와 우리 주변에는 똠방각하들이 많다. 완장병에 걸린 자신을 알리가 없는 이들 똠방들은 자기만의 정의를 앞세워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늘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무능력하지만 능력이 있는 것처럼 허풍 떨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 이들 똠방각하들의 공동적인 행태다. 그들은 늘 그게 정의고 봉사이며, 속한 조직과 사회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참으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이들 똠방들은 자신 주변인의 불편함과 어려움, 그리고 고통과 불쾌함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똠방들이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 완장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결국 그런 똠방들의 무소불위 권력은 미래에 대한 자기 자신을 옥죄게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서서히 끓어오는 냄비 속에 개구리처럼 유영하다 몸이 마비되어 옴을 느끼고서야 깨닫고 후회하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는다. 2014년 연말. 이 시점에서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불쌍한 똠방, 왼쪽 팔뚝에 완장을 찬 똠방들의 황폐한 영혼을 위해 그저 기도하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어 깊은 안타까움만 밀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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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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