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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군복
    6월이 되면 생각나는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어느 문학관에 견학하러 갔다가 벽에 걸린 시를 보고 베껴왔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이 시를 꺼내어 보며 나라를 지키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 시는 2007년 울산 보훈 지청에서 공모한 보훈 문예 현상공모 일반부에서 우승한 조명숙 시인의 ‘승천한 아버지의 군복’이란 시(詩)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늘 말씀하셨다/ 사람의 행동은 입고 있는 옷이 만든다고/ 한평생 군복만 입고 살아온 아버지는/ 세상 옷, 입자마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전국 해안의 초소를 돌던 아버지의 군복/ 방 안 구석 짭쪼롬한 바다 냄새 풍기며 걸려있었다/ 식구들 어느 누구도 선뜻 입지도 버리지도 못하였다/ 점점 먼지가 쌓여가도, 아버지가 벗어두고 간 영혼 같아서/ 버리기도 태우기도 어려웠던 아버지의 낡은 군복/ 몸을 비운 헐렁한 아버지의 군복은/ 캄캄한 밤이면 이따금 스님의 승복처럼/ 신부의 사제복처럼 성스러운 빛을 내뿜곤 했었다/ 얼마나 많은 유혹을 이겨온 옷인지/ 얼마나 많은 땀을 받아낸 옷인지/ 얼마나 많은 총알을 받아낸 옷인지/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낡은 군복에 관심이 없었지만,/ 늘 함구가 장끼이던 선임하사 아버지처럼/ 방 안 구석 있는 듯 없는 듯 십자가처럼/ 못 하나에 걸려있었던 아버지의 군복/ 어느 날 단단한 못 하나 남겨 놓고/ 승천(昇天)하고 없는 아버지의 군복.」 아버지는 일생을 전국 해안 초소를 돌아다니며 근무한 직업 군인이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퇴역을 하자마자 몹쓸 간암에 걸려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남들이 늘 입고 다니는 세상 옷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끼던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평생 입었던 군복을 벗어 놓고 이제 막 세상 옷을 입고 살아보려는 순간 군복 한 벌을 남겨 놓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입고 있는 옷이 만든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 마음도 행동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 아버지는 군복이 좋아서 입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복을 입고 있으므로 나라를 더 사랑하게 되고 군복을 입고 있으므로 더욱 더 국토방위에 그 책임을 느낄 수 있다는 그 뜻을 이렇게 자식 앞에, 아니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런 이별 앞에 가족들은 아버지가 평생을 입고 있던 군복을 차마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점점 먼지가 쌓여가도 아버지의 영혼이 깃든 군복을 어느 누구도 감히 입거나 버리지 못하고 벽에 걸어 놓았습니다. 아버지의 군복은 한낱 의복이 아니었습니다. 벽에 걸린 아버지의 군복은 아버지의 혼이 배어 있고 땀이 배어 있고 아버지의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군복은 도를 닦는 승복이었습니다. 아니 신부의 성스러운 사제복이었습니다. 아버진들 왜 남들처럼 떵떵거리며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넓고 넓은 세상에 나가 마음껏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세상으로 향하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오직 나라 사랑에 대한 집념으로 일생을 군인으로 보내셨습니다. 못에 걸려있는 땀내 나는 아버지의 군복 속에서 딸은 십자가의 예수님 형상을 발견합니다. 비록 장교도 아닌 부사관 신분이었지만. 오직 나라를 사랑하고 지킴이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사랑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과 희생으로 온 국민이 마음 편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입었던 군복은 그래서 더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군복은 십자가처럼 숭고하고 위대한 사랑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군복은 언젠가는 버려지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정신과 큰 뜻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요. 생각해 보면 이 땅에는 수많은 조명숙 시인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과거에도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 이 땅을 지키신 호국 선열들이 있었고, 지금도 처처에서 명절도 없이 밤잠도 자지 못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러한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내 나라 내 조국을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 정신을 상기하며 <승천한 아버지의 군복>을 조용히 읊조려 봅니다./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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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5
  • y=ax+b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 사람도 공휴일은 왠지 느긋해진다. 월요일이 현충일이라 사흘 연휴가 되고 보니 어디엔 가라도 나가고 싶었다. 시골 정경을 찾아 드라이브했다. 긴 가뭄이 사람들의 속을 태우고 있지만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이앙기가 지나간 자리엔 어린모들이 줄을 만들고 있었다. 나란히 서서 못줄을 넘겨가며 허리 굽혀 모 심던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머리에 새참을 이고 손에는 주전자를 든 채 논두렁길 걷던 아낙의 정경도 옛 일이 되었다. 농촌에 일할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데 만일 이앙기가 없었더라면 넓은 논에 어떻게 모를 심을 수 있을까? 다 살게 마련인가? 요즘도 일선 기관에서는 모내기 실적을 일일 보고할까 문득 떠올랐다. 그랬다. 70년대까지 읍면행정의 절반, 어쩌면 그 이상이 농업과 관련된 일이었다. 소관업무보다 분담 마을에서 농사일을 지도(?)하고 파악하는 일이 주 업무이다시피 했다. 보고할 거리도 많았다. 얼음장이 녹을 무렵이면 보리밭에 ‘토입답압(土入踏壓)’이라 하여 흙넣기와 밟아주기 실적을 보고해야 했다. 밭에 서릿발이 녹으면 보리 뿌리가 들떠 마르지 않도록 하는 농사일이었다. 요즘은 좀처럼 보리를 구경조차 할 수 없으니 격세지감의 하나다. 그때는 논두렁 태우기도 장려했다. 봄철에는 모내기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당연히 일일보고 사항이었다. 그렇다고 날마다 담당 마을의 진도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설령 나간다 한 들 어떻게 할 것인가? 자동차는 물론이고 전화조차 없던 시절에 이장께 묻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방법을 찾았다. 일차함수 y=ax+b를 소환했다. y는 이앙 면적, a는 하루 이앙 추정 면적으로, 전체 논 면적을 모내기 기간인 대략 30일로 나눈 것이다. x는 기간이고, b는 변수, 예를 들어 비가 내린다든지, 일손돕기 인력이 지원 나왔다 던지 하는 상황을 감안하여 가감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산출하여 담당자에게 제출하는 식으로 모내기철을 보냈다. 필지별로 모 심은 상황을 기록하는 야장(野帳)도 있었다. 모 포기수를 적게 하고 빽빽하게 심으라는 소주밀식(小株密植)은 기존 관행을 바꾸는 일이라 어려움이 많았다. 소주밀식이란 ‘소주마시고 밀가루 음식을 먹는 것이냐’라는 우스개로 어려움을 달랬다. ‘보리밥보다 낫고 밥맛은 없더라도 주린 배 채우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논리로 다수확 품종 통일벼를 장려할 때는 일반 못자리를 짓밟고 심은 모를 뽑아내는 곳까지 있었으니 지금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뭄이 심하여 모를 심지 못한 채 7월이 되면 논바닥을 파고 심는 호미모, 흙이 풀풀 날리는 논에 볍씨를 직접 뿌리는 건답직파(乾畓直播), 콩이나 다른 작물을 심는 대파(代播)까지 해야 했다. 도랑이나 개울에 물이 조금이라도 고이면 바가지로 쥐어짜듯 해서 물을 댔다. 2단, 3단 양수라도 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었다. 아전인수(我田引水) 끝에 물꼬싸움도 일어났다. 모내기철이 지나면 벼 이삭이 익어갈 무렵까지 병해충 방제 회수와 면적을 파악해야 했다. 여름철 퇴비증산 독려가 곤혹스러웠다. 농가마다 퇴비장을 만들거나 손질하고 잣대(尺棒)를 세우도록 도록 했다. 아침저녁으로 풀을 베어 퇴비장에 쌓도록 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소먹이 꼴도 모자라는 판에 퇴비는 농토의 보약이라고는 하지만, 몰라서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이나 도에서 점검 나온다고 하면 솔가지나 볏짚 위에 풀을 덮어 많이 한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가을이면 벼 베기 실적도 일일보고 사항이었다. 역시 y=ax+b 공식을 끄집어냈다. 벼를 베고 난 뒤에도 해야 할 일이 기다렸다. 땅 힘을 높이는 심경(深耕)이라 하여 논을 깊이 갈고, 황토를 뿌리는 객토(客土)를 하는 일이었다. 소가 쟁기를 끌어 논바닥을 뒤집었다. 우마차나 덤프트럭으로 황토를 실어 나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정부에서 시중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사들이는 양곡수매는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담당 마을의 돼지 사육 두수를 급히 파악하라고 했다. 그것도 암수로 구분하라는 것이었다. 마을에 다녀오는 시간조차도 되지 않았다. 그냥 암퇘지 28마리, 수퇘지 4마리 하여 32마리라고 했다. 그런데 기적이었다. 나중에 파악해보니 한 마리도 틀리지 않았다. 통계청은 벼, 마늘, 사과 등 120종 작물에 대해 전국 79만 곳 논밭 가운데 표본농지 2만2천 곳을 선정, 사람이 직접 방문해 측정하는 방식을 올해 벼부터 인공위성, AI통한 재배면적 파악 시작한다고 한다. 어느 경제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다. 통계도 과학이다./가기천/전 서산시 부시장/ka12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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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7
  • 6월을 맞으며
    「20여 년 전, 90세 가까이 되시는 고령의 할아버지가 종로세무서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큰 상을 받았는데 세금을 계산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때 직원은 “고령이신데 이렇게 찾아오셨다”고하니, 그는 “세금을 최고로 많이 낼 수 있도록 계산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받아 본 세금 납부 통지서에 대하여서도 세금을 왜 이렇게 조금만 매기느냐며 우겨서 억지로 최대한 내도록 했더니 “내가 애국 좀 하려는데 도와주지 않는다”라며 섭섭해 했다고 합니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뼛속 깊이 느낀 그때 그 사람–한효섭 칼럼에서) 이분은 바로 일제 강점기에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선생은 “나라 없는 식민지 국민으로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오직 달리고 달리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기쁘지만, 웬일인지 기쁨보다는 알지 못할 설움만이 가슴에 북받쳐 울음만 나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승 후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가슴에 단 일장기가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찌 선수인 손 선생만 그렇겠습니까?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소식을 전하던 <조선 중앙일보>는 일장기를 일부러 흐리게 하였고 <동아일보>는 아예 일장기를 지워버렸습니다. 이에 따라 신문은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서러운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움직이는 것이, 나라 없는 백성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라 없는 백성들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출애굽 때도 그랬고, 1948년에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도,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흩어져 살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결국 오늘의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입니다. 6월은 유난히 호국에 관련된 날들이 많습니다. 6월 1일은 의병의 날로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날(음력 4월 22일, 양력 6월 1일)이며, 6월 6일은 현충일로 나라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과 순국선열의 충혼을 기리는 날입니다. 또 6월 25일은 잊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북 군사분계선인 38선을 넘어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6월 29일은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날입니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 어찌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잊어가고 있습니다. 엊그제 초등학생에게 6.25 때 어느 나라가 쳐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인가?”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나라 사랑은 백번 천 번 외쳐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광복한 지 겨우 77년, 6.25 동족상잔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지금, 나라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 영령들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인류의 문명은 도전과 응징이라 정의했습니다.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문명마저도 닥쳐오는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면 생존하고 번영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결국 존립 자체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로마의 전략가인 베제티우스는 “진정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라고 했습니다. 소멸시효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모든 채권 채무는 일정한 시간이 경과 하면 권리가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잠자는 권리는 보호할 가치가 없다네요. 평화를 지킬 능력이 없는 국민은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지금 소련과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약하다고 생각할 때 침략당합니다. 장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이 바로 의지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의 정신력입니다. 6월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고귀한 목숨을 바친 선열의 고마움을 새겨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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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7
  • 카마스터의 근로자 파견관계 성립여부
    [요지] 자동차 판매대리점 소속 카마스터와 자동차회사 사이에 근로자파견관계가 성립하는지 여부가 문제된 사건 (대법원 2022. 5. 26. 선고 2021다210621 판결) [사례] 원고들은 피고(자동차회사)와 판매대리점 계약을 체결하고 자동차를 판매하는 판매 대리점주에게 채용되어 자동차 판매업무에 종사한 카마스터들로서, 대리점주를 파견사업주, 자동차회사인 피고를 사용사업주로 하는 근로자파견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피고인 자동차회사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내지 직접고용의무 이행을 청구한 사안 [대법원판단] 구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2013. 3. 22. 법률 제11668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2조 제1호에 의하면, 근로자파견이란 파견사업주가 근로자를 고용한 후 그 고용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로자파견계약의 내용에 따라 사용사업주의 지휘ㆍ명령을 받아 사용사업주를 위한 근로에 종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원고용주가 어느 근로자로 하여금 제3자를 위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경우 그 법률관계가 위와 같이 파견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파견에 해당하는지는 당사자가 붙인 계약의 명칭이나 형식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제3자가 당해 근로자에 대하여 직간접적으로 그 업무수행 자체에 관한 구속력 있는 지시를 하는 등 상당한 지휘ㆍ명령을 하는지, 당해 근로자가 제3자 소속 근로자와 하나의 작업집단으로 구성되어 직접 공동 작업을 하는 등 제3자의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원고용주가 작업에 투입될 근로자의 선발이나 근로자의 수, 교육 및 훈련, 작업ㆍ휴게시간, 휴가, 근무태도 점검 등에 관한 결정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지, 계약의 목적이 구체적으로 범위가 한정된 업무의 이행으로 확정되고 당해 근로자가 맡은 업무가 제3자 소속 근로자의 업무와 구별되며 그러한 업무에 전문성ㆍ기술성이 있는지, 원고용주가 계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독립적 기업조직이나 설비를 갖추고 있는지 등의 요소를 바탕으로 그 근로관계의 실질에 따라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15. 2. 26. 선고 2010다106436 판결 등 참조). 대법원은 위 법리를 기초로, 자동차회사인 피고의 대리점들에 대한 판매목표 달성 독려, 업무표준 마련, 주기적인 평가, 판촉활동의 지시, 판매업무를 위한 전산망 등 프로그램의 제공, 카마스터들에 대한 영업교육의 실시 등은 카마스터들에 대한 지휘·명령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는 점, 카마스터들이 피고의 지점 소속 판매사원들과 함께 판매업무를 수행한다고 볼 수 없고 사실상 영업상 경쟁관계에 있는 등 카마스터들이 지점 소속 판매사원들과 하나의 작업집단을 구성하여 직접 공동의 작업을 함으로써 피고의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 카마스터 채용에 관한 결정권은 대리점주에게 있었고, 피고는 카마스터의 채용, 근태 관리 등에 관여하지 않은 점, 카마스터의 업무는 자동차 판매업무나 이를 위한 부수업무로 한정되었고, 전문성이 있는 점, 대리점주는 자신의 비용과 노력으로 점포를 개설하고 카마스터를 채용한 독립된 개별사업자로서 피고의 거래상대방으로서의 실질을 가지는 점 등을 이유로 근로자파견관계의 성립을 부정한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판시하여 원고들의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 자료제공 :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산출장소 (041-667-4054, 서산시 공림4로 22, 현지빌딩 4층, 전화법률상담 국번없이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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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7
  • 야인(野人) 4년, 새 시정의 큰 자산이길
    선거는 끝났다. 으레 그러하듯 당선인에게는 축하를, 뜻을 이루지 못한 분에게는 위로를 드린다. 당선자를 가려야 하는 선거에서 어쩔 수 없이 승패의 결과를 보아야 하는 심정이 가볍지만은 않다. 더구나 고향의 선거를 주시하면서도 관심을 표명하지 못한 것은 부득이했다. 무슨 변명이 필요할까? 멀리서 보는 마음이 그랬으니 늘 가까이에서 보며 지내는 분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충분히 헤아려 졌다. 몇 분과 연락하다 보면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워 해야 하는 것이 고충이라고도 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선거기간 중에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도 했다. 공무원들은 어땠을까? 언행을 극도로 조심하는데도 이런 저런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으니 처지가 이해되었다. 본의 아니게 ‘누구 사람’이라는 낙인이라도 찍히면 그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짐작을 넘어선다. 심정을 충분히 알만하다. 선거가 인간관계를 엇갈리게 하고 보니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구호는 어쩌면 당사자에게는 수사에 불과한 듯싶다. 지방 선거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자리는 아무래도 ‘시장’이 아닐까 한다. 도지사는 너무 멀고, 교육감은 관심이 덜하다. 지방의원은 합의제 기관의 일원으로 독임제 기관과는 역할과 위치가 다르다. 그러니 자연히 시장이 관심을 끄는 것이다. 이번 서산시장 선거에서 두 가지가 초점이었다. 하나는 현직 시장의 연임에 성공할 것인지와 처음으로 3선 시장 탄생여부이었다. 그동안 시장은 현직에서 불출마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두 번만 시민의 선택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초선인 현직 시장이 재선의 기록을 이어가느냐와, 서산은 그동안 3선한 사례가 없었는데 이 기록이 깨지고 3선 시장이 나오는 것일까 이었다. 또 하나는 행정가인 시장이 다시 선택받을까, 정치를 주로한 시장이 연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역대 다섯 명의 민선 시장가운데 셋은 정치나 사회활동 경력을 가졌고 둘은 행정공무원 출신이었다. 두 유형은 나름 특색이 있다. 정치인 출신 시장은 외부활동에 주력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었다. 일찍부터 시민과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밑바탕 소리를 들어 왔기에 외부 여론에 민감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행정가 출신은 시민이나 현장보다는 상대적으로 내무에 강점이 있으므로 행정업무를 꼼꼼히 챙기고 따라서 공무원들이 긴장해야 한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일하려는 공무원은 오히려 공무원 출신을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여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서산에서 처음으로 3선 시장이 나왔다. 마음 깊이 축하한다. 이 완섭 시장 당선인은 중앙과 고향에서 직업공무원으로 연륜을 쌓았고, 이미 4년 전, 7년 가까이 시장으로 일했으며, 그 이전에 부시장으로도 일한 경험이 있으므로 서산에 관하여는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야인으로 지낸 4년은 공무원이 아닌 신분으로 시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다른 일을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고 기회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은 어느 시장도 갖지 못한 것으로써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치로 축적되었을 것으로 본다. 바깥에서 시정을 바라보며 다시 맡고자 하는 마음도 간절했을 것이다. 이제 새로 갖게 되는 기회를 아낌없이 그리고 주저 없이 쏟아 부을 것으로 믿고 기대한다. 할 일 가운데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내부 결속을 다지는 일이다. 시민들을 한데로 모으고 화합하는 일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하고자 하는 일을 뒷받침하는 공무원들이 의욕적으로 일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시 그늘에서 한숨짓는 공무원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대전의 어느 구청장은 선거에 당선되자 어느 사람이 들고 온 공무원 명단을 보지도 않고 태워버렸다고 했다. 그런 포용성은 그 뒤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새로 당선된 시장은 전에 재임 시 구상했거나 추진했던 사업이 있고, 현 시장이 추진한 사업도 있다. 이런 사업을 포함하여 공약으로 제시한 일도 적지 않다. 중앙에서 다년 간 쌓은 경험과 시정을 이끌며 축적한 역량을 바탕으로 집권당 주요 당직을 맡고 있는 지역 출신 국회의원, 도·시의원들과 힘을 모아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성과를 거둘 것을 기대한다. 아울러 출향인들이 ‘고향 서산’을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전, 서산시부시장(ka12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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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2
  • 아버지, 아! 아버지
    “엄마란 무슨 존재인가?”라고 물어본다면, 머릿속에서 단번에 나오는 그림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세월이 지나 고민을 해봐도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이건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20대 초반이 된 여인의 글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글이 한때 내가 가졌던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었고, 어쩌면 내 아이들도 이런 마음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머니처럼 말만 들어도 핑하고 눈물이 나는 애틋함도, 그리움도, 죄책감도 아닌, 무언가 참으로 많은 복합적인 존재가 아버지란 이름이니까요. 누군가는 아버지의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4살 때는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고. 7살 때는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가, 12살이 되면 ‘아빠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로 바뀌고. 14살 때는 우리 아빠와 난, 세대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25세가 되면 아버지를 이해하긴 하지만, 기성세대는 이미 갔습니다. 30살이 되면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가 되면 아버지 의견도 들어봅시다. 50세가 되면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라고 했다가 60살 때가 되면 아버님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조언이라도 들었을 텐데. 그러면서 말합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요. 나도 세월이 지나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를 알게 되었고, 더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으니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한 유리로 되어 깨어지기도 잘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같이 절대적 가부장 제도에서 태어나 자유주의 시대를 살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딸을 프랑스 파리에 떼어놓고 오면서 드골 공항 공중화장실에서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저 좋아서 한 결혼이지만, 머나먼 이국땅에 떼어놓고 오자니 만 가지 생각이 났습니다. 물론 아내도 울었겠지요. 서로 한 약속은 아니었지만, 딸아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지요. 화장실에서 나온 아내의 눈도 뻘겋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벌써 세월이 많이 흘러갔습니다. 지금은 잘살고 있지요. 손녀가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난 프랑스 공항에서 펑펑 울었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딸을 사랑합니다. 몇 해 전 집에 왔을 때 내가 가장 귀한 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창조문학 대상 때 받았던 순금 메달을 주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니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딸은 자주 몇 시간씩 통화하고 있습니다. 나와는 거의 통화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딸의 목소리는 흘러나오는 아내의 전화기에서 듣고 있지요. 내 소식도 잘 알고 있겠지요. 언젠가 전화가 왔을 때 잘 있었느냐는 한마디를 하고 나니까 별로 할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마 바꿔줄게’하고는 아내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지요. 문득, 전에 들었던 미국에 유학 간 아들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어머니와는 매일 통화하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나서 전화했답니다. 유학을 보내준 건 아버지의 덕분인데 제대로 아버지에게 감사의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게 걸리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위로해 드려야겠다고 전화했더니 그 아버지도 나처럼 “엄마 바꿔줄게” 했다지요. 그러자 아들이 “아니요, 오늘은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려고요.” 이때 아버지의 말 “왜? 돈 떨어졌니?” 아들이 당황해서 “아니요, 아버지께 큰 은혜를 받고 살면서 너무 불효한 것 같아 오늘은 아버지와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고 싶어요.” 했더니 아버지 대답 “너, 술 마셨니?”라고 했답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서글픈 아버지의 자화상입니다. 나도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저 매일 새벽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을 뿐이지요. 뭘 바라고 키웠겠습니까?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면 족하지요. 저세상에 계신 아버지가 한없이 그립습니다. 열일곱 살짜리 아들을 대처에 보내 놓고 제때 학비를 보내지 못해 할아버지 제상(祭床) 앞에서 목 놓아 우셨다는 아버지. 아버지가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아버지, 아! 아버지. 불러도 대답이 없으십니다./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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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2
  • 후보자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 보자
    아파트 정문에 한 후보자가 팻말을 들고 서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폴더 인사를 한다. 후보자에게 “파이팅하세요”라고 말해 주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후보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허리는 더 굽어졌다. 전혀 모르는 후보자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필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편과 접하고 있는 네거리는 대전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곳이다. 그런 곳이다 보니 후보자로서는 많은 시민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다. 각지角地마다 후보자나 운동원들이 손을 흔들고 율동을 하며 인사한다. 일하고 싶은 의지나 열정으로 나섰거나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입후보 했거나 이유를 묻기 전에 그 뜻이 가상하여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후보자 입장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관심을 보여줄 때 얼마나 힘이 솟을까 짐작한다면 재물을 들이지 않고 하는 보시布施가 아닐까 싶다. 선거운동처럼 간절하고 힘 드는 일이 흔치는 않을 것이다. 후보자는 자신이 선택한 일이기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내리 꽂는 햇볕, 소음과 매연을 무릅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심정은 요즘 가뭄에 타들어 가는 대지와 같을 것이다. 투표권이 몇 개라도 된다면 고루 한 표씩 주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다 투표를 한낱 동정심의 하나로 치부하는 엉뚱한 망상에 까지 이르렀는지 후보자의 절실한 심정이 되어 본 것으로 변명한다. 어느 후보자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은 한낱 속담에 그칠 뿐이라고 했다. 노골적인 반감에는 움츠러들고 맥이 빠진다는 것이었다. 명함을 건네주면 뿌리치는 것은 고사하고 보는 앞에서 홱 집어던지더라도 섭섭한 감정을 꾹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런 수모를 겪고 비용을 들이며, 가깝게 지내던 사람마저 고개를 돌리게 하는 선거에 나서는 것은 당선 후에 펼쳐 보고픈 포부가 훨씬 더 크다는 판단에서 일까? 명예를 얻고자 해서일까? 가까이에서 선거운동을 지켜본 적이 있다. 후보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돌아다니다 밤이 되면 녹초가 되었다. 가라앉아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을 약초 우린 물로 달래고 퉁퉁 부어오른 다리는 소금을 푼 따뜻한 물에 담근 채 내일 일정을 가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닥이 드러나는 선거비용을 감당하느라 속은 타들어 갔다. 그래도 별빛 남아있는 새벽에는 용수철 튀어 오르듯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밤사이 에너지가 얼마나 충전되었는지 초인적 집념에서 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투표안내문과 선거공보가 우편함에 들어있다. 꽤 무게감이 느껴졌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시장 후보자 둘 가운데 한 분은 인사하며 지내는 사이이고 한 분은 일면식도 없다. 교육감 후보는 넷인데 한 분은 몇 차례 만나 선이 닿고 세 분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구청장은 전·현직 양자 대결인데 역시 한 분은 알고 한 분은 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다. 시의원 후보는 둘, 구의원 후보는 여섯인데 전혀 모르겠다. 현역의원 조차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비례대표를 소개하는 홍보물도 들어있는데 어느 정당은 이름조차 생소하기도 하고 후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찬찬히 읽었다. 인물을 살펴보고 공약도 훑어보았다. 30 분 쯤 걸렸다. 실현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가하면 그저 공약에 지나지 않는 것도 없지 않았다. 공약대로 실행만 된다면 하는 바람과 더불어 설령 뜬구름일 지언 정 그마저 없다면 선거의 맛을 어디서 찾겠는가 싶었다. 모르는 인물보다 아무래도 아는 분에게 관심이 더 가겠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알고 모르고를 떠나 인물과 실현 가능한 공약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쪽으로도 마음이 기운다. 지방자치 무용론과 선출직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방자치의 효과를 가볍게 볼 수 없다. 외면하고 비판이나 하는 것은 지방자치의 구성원으로서 성숙한 시민이라 할 수 없다. 지방자치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유권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선거일이 일주일 남짓 남았다. 선거는 축제다. 축제가 되어야 한다. 지방자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치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인물, 청렴하고 역량을 갖춘 인물이 선출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진정 시민과 미래를 위하여 사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인물이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 이다. 나를 대신하여 일해 보겠다고 나선 후보자의 기개와 용기가 가상치 않은가? 절실한 심정으로 한 표를 호소하는 후보자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 보자.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베풂이다./전 서산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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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4
  • 소통 부재의 시대-(하루만이라도)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부탁하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명 가운데 3명은 몸이 아파도 집안일을 부탁할 사람이 주변에 없고, 10명 중 5명은 갑자기 목돈이 필요할 때 손을 벌릴 지인이 없다는 통계청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2022.2.24.) 낙심하거나 우울해도 10명 중 2명은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을 만큼 한국인은 20%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는 코로나가 장기화하면서 사회적 고립감이 커진 것이란 분석입니다. 그러나 비단 코로나란 전염병 때문만은 아닐 듯싶습니다. 4차 산업 시대에 접어들어 스마트 폰이나. 인공지능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 사이의 소통 부재는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식당에 한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들어와 한 식탁에 앉아 주문한 음식이 들어오기 전, 사람끼리의 대화는 들을 수 없고, 모두 스마트 폰을 꺼내어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마저 참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황혼이혼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참고 살다가 이제는 자유롭고 남은 생이라도 평안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이혼 원인의 대부분이 신뢰 부족이나 일방적 인식의 틀에 갇혀 살다가 생긴 감정의 골이 쌓여 결국 막다른 골목까지 이른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노부부 황혼이혼 일화는 소통의 부재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말해줍니다. 이혼한 노부부가 법정을 나올 때 이혼 절차를 맡아주었던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저녁을 먹자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세 사람은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문한 음식은 통닭이었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마지막 선물하는 심정으로 할머니가 좋아했던 닭 날개를 찢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응당 좋아할 줄 알았던 할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혼하는 날까지 날개를 줘? 아니, 당신은 날개를 좋아했잖아? 내가 날개를 좋아해서 날개만 먹은 줄 알아? 나도 닭다리가 좋다고. 그럼 진작 싫다고 말하지 않았어? 두 사람은 다투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돌아간 할아버지는 아내가 했던 말에 심한 자책감이 들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할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화 받기를 거절했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진심을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어 후에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고 합니다. 남편께서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 달려가 보니 할아버지의 핸드폰에서 보내려다 못 보낸 문자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보, 미안해. 사랑해, 용서해 줘” 우리 같은 세대는 감정표현이 서툽니다. 아니, 아예 입을 닫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자는 사랑하는 마음만 가슴에 담고 있으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걸 꺼내어 내놓기를 원하지만,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갈등은 어디서 올까요? 다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갈등은 소통의 부재에서 온다고 합니다. 소통이란 사물이 막힘이 없이 잘 통하는 걸 말할진대 이웃은 고사하고 부부간의 대화마저 끊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 대신 인공지능 기계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인공지능과 농담도 하고 스무고개 놀이도 합니다. 커튼 쳐 놓고 대화하면 사람인지 로봇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TV 속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계는 영원한 기계일 뿐, 기계가 인간의 영혼까지 달래줄 수는 없습니다. 로봇은 웃을 수는 있어도 눈물을 흘릴 수는 없습니다. 소통하지 못하는 삶은 슬픈 삶입니다. 안타까운 삶입니다. 잠시 스마트 폰을 내려놔 보지요. 막혔던 입을 열고 기계 대신, 문자 대신 말을 해보면 어떨까요? 지난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2와 1의 의미는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날 하루만이라도 마주 한번 쳐다보셨나요? 곱던 얼굴, 어느새 골 깊은 주름이 가득하고 까마귀 같던 검은 머리는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이 보이지는 않았나요? “여보, 고생했어요” “여보, 수고했어요” 누가 압니까? 이말 한마디가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닫혔던 소통의 문이 활짝 열릴지./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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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4
  • 회사 대표가 술 강권…게시 글 허위·비방 아냐
    [요지] 피고인이 페이스북에 ‘과거 자신이 근무했던 회사 대표가 직원들에게 술을 강권하였다’는 취지의 글을 게시한 것이 허위인지 여부, 비방의 목적이 있는지 여부가 문제된 사건 (대법원 2022. 4. 28. 선고 2020도15738 판결) [사례] 피고인이 페이스북에 과거 자신이 근무했던 소규모 스타트업 회사의 대표가 회식 자리에서 직원들에게 술을 강권하였다는 취지의 글을 게시하여 정보통신망법 제70조 제2항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기소된 사건에서 위 내용이 허위인지 및 피고인에게 비방의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가 문제된 사건. [대법원 판단]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정보통신망법’이라고 한다) 제70조 제2항이 정한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피고인이 적시하는 사실이 허위이고 그 사실이 허위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적시된 사실의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되는 경우에는 세부에 있어 진실과 약간 차이가 나거나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더라도 이를 거짓이라고 볼 수 없다. 거짓인지를 판단할 때에는 적시된 사실 내용 전체의 취지를 살펴 객관적 사실과 합치하지 않는 부분이 중요한 부분인지를 결정하여야 한다(대법원 2012. 10. 25. 선고 2011도13245 판결 등 참조). 같은 항에서 정한 ‘사람을 비방할 목적’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과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라는 방향에서 상반되므로, 적시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비방할 목적은 부정된다(대법원 2011. 11. 24. 선고 2010도10864 판결 등 참조).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에는 널리 국가·사회 그밖에 일반 다수인의 이익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그 구성원 전체의 관심과 이익에 관한 것도 포함되며, 나아가 공공의 이익관련성 개념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공공의 관심사 역시 상황에 따라 쉴 새 없이 바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적인 인물, 제도 및 정책 등에 관한 것만을 공공의 이익관련성으로 한정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실적시의 내용이 사회 일반의 일부 이익에만 관련된 사항이라도 다른 일반인과의 공동생활에 관계된 사항이라면 공익성을 지닌다고 할 것이고, 개인에 관한 사항이더라도 그것이 공공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고 사회적인 관심을 획득한 경우라면 직접적으로 국가·사회 일반의 이익이나 특정한 사회 집단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공공의 이익관련성을 부정할 것은 아니다. 사인이라도 그가 관계하는 사회적 활동의 성질과 사회에 미칠 영향을 헤아려 공공의 이익에 관련되는지 판단하여야 한다(명예훼손죄에서의 ‘공공의 이익’에 관한 대법원 2020. 11. 19. 선고 2020도5813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이러한 법리에 따라 대법원은 개인적 환경이나 근로 환경에 따라 회식 자리에서의 음주와 관련한 근로자 개인이 느끼는 압박감의 정도가 다를 수 있는 등 그 판시와 같은 사정을 들어 피고인이 게시한 글이 허위사실이 아니고, 비방할 목적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습니다. - 자료제공 :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산출장소 (041-667-4054, 서산시 공림4로 22, 현지빌딩 4층, 전화법률상담 국번없이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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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4
  • 아날로그 세대가 느끼는 요즘의 교육
    5월 15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로 섬겨야 한다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니 ‘있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임금도 없는 시대요, 아버지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으니 어찌 스승만 홀로 남아 대접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엔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화장실에서 나오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도 오줌을 누시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선생님을 신비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신대 총장이셨던 김재준 박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교단에서 10년 봉직하셨으면 그분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머리에서 모자를 벗고, 20년을 봉직하셨으면 허리를 굽히고 30년을 봉직했으면 무릎을 꿇어라’이런 글을 읽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아도 제자는 없다’라고 합니다. 예전의 학교 교육은 지식 교육뿐만 아니라 인성교육까지 겸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 현실은 사람을 만드는 교육보다는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만 남았습니다. 그것도 공교육은 제도만 남았고 오히려 지식전달의 수단은 사교육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 지도를 하려다 학 부형에게 혼쭐난 신문 기사를 가끔 봅니다. 그러니 누가 섣부르게 인성교육을 하려 들겠습니까? 큰 교회야 유아실을 따로 두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에서는 어린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 어린이가 뛰어다니는 걸 보고 그냥 못 본 척하는 젊은 부모를 봅니다. 식당 같은 곳에서 아기가 마구 뛰어다녀도 그냥 내버려 둡니다. 속으로 뭐라고 참견하고 싶지만, 꾹 눌러 참습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인성교육을 하지 않으면 아이는 장차 커서 어떻게 살아갈까요?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솝이 어렸을 때 목욕탕에 사람이 많은지를 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목욕탕엘 갔습니다. 목욕탕 입구에 돌이 하나 놓여 있는 걸 보았는데, 여러 사람이 돌을 피해 드나들면서 아무도 그 돌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어린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한 남자가 아이를 일으켜 준 뒤 그 돌을 번쩍 들어 치우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이솝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목욕탕에는 한 사람 밖에는 없어요’ 맹자는 사람이 사람 같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짐승 할 짓을 사람이 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지요? 오늘의 교육이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기능인을 만들고 있다면 인성교육은 어쩔 것인가요? 교육 현장이 이렇다면 가정에서라도 인성교육을 담당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부모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5~6세 경부터 성경 과목을 가르치고 10세부터는 유대 구전법 수록 집인 미 쉬나를 가르치고, 13세에는 계율을, 그리고 15세에는 탈무드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세계인구의 02.0%밖에 되지 않은데도 노벨상 수상자는 179명이나 배출한 이유도 어쩌면 그들의 교육 방법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교육부 장관을 지냈으며 아시아 교육협회 이사장인 이주호 전 청와대 교육과학문화 수석은 지식 교육은 AI가, 교사는 인성‧창의성 교육을 담당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요즘 20대 이하 사람들을 가리켜 Z 세대라고 부릅니다. 디지털 원주민 세대라고 합니다. 그의 주장대로 오히려 지식전달은 기억과 능력의 한계가 있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AI가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기계가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쳐줄 수는 있어도 기계는 기계일 뿐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선생이 스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식전달자가 아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스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가정에서부터 인성교육의 바탕을 길러내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를 따라가기 버거운 아날로그 세대가 바라본 오늘의 교육 현실은 세대 차이만큼 답답하기만 합니다./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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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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