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보초’다?
가기천의 일각일각

6.3 대선과 맞물려 국민의 시선은 여기에 쏠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지만, 최근 한 통신사 해킹 사고와 관련하여 가입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개인정보 유출 염려와 몰래 자기 이름으로 대출받는 금융사기 걱정이 크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한은형은 해킹 사고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유심칩을 갈게 된 경위를 시간대별로 글을 썼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아침부터 대리점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보며 11시 30분 그 줄에 합류했다. 오후 1시 반에 번호표를 받고 그늘도 없는 곳에서 기다렸다. 3시간 20분 만에 드디어 유심칩을 교체했다. 버텨서 해냈다. 하지만 뭘 해냈나? 내가 유심칩을 교체해서 얻은 이익은 없다. 겨우 현상을 유지했을 뿐이다. 미미한 안심을 얻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현상 유지’ ‘미미한 안심’이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긴 시간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며 고작 해 낸 일이 무엇을 얻거나 이룬 것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한 것에 대한 소감을 실감 나게 썼다. 하지 않아도 될 일에 공연히 에너지를 썼을 때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뜬금없이 ‘공무원은 보초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공무원이 보초라니? 옛날 낮과 밤, 평일과 공휴일을 구별하지 않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무실을 지켜야 했던 시절에 길든 인식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탓도 크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서도 그냥 ‘5분 대기조’ 상태로 말이다. 요즘 기준으로는 너무 뒤떨어진 행태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당연하듯 그랬다. 의문을 품지 않았다.
보초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거나 어떤 결과물을 내놓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근무 중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하여 보초가 놀거나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리를 뜨거나 다른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된다. 뚫리면 큰 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민원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민원실을 비울 수는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상황이 없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직원이 밤을 지새우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냥 논 것인가? 당직원은 없어도 되는가? 평온하더라도 상황을 파악하고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다.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이 24시간 대기하는데 화재나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근무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 언제라도 필요할 때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믿음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보초론’을 유지한다.
한편, 국민은 공무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손과 발을 움직이며 무언가 하는 모습과 결과를 바란다. 성의 있는 자세를 원한다. 가령 민원인은 기다리고 있는데 공무원들이 모여서 잡담이나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릴없이 앉아 있거나 지루한 모습을 보인다면 불만을 느끼게 된다. 심리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보다 길게 느껴진다. 때로는 별것 아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시대는 공무원의 의식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공무원법과는 별도로 공무원으로서 지향하는 선언이고 추구하는 규범으로 ‘공무원 헌장’이 있다. 1980년 처음 제정된 ‘공무원 윤리헌장’은 공무원들은 암송해야 했다. ‘이 생명은 오직 나라를 위하여 있고, 이 몸은 영원히 겨레 위해 봉사한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헌장은 ‘충성과 성실은 삶의 보람이요 공명과 정대는 우리의 길이다’라고 이어졌다. 마치 비장한 지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2016년에 ‘윤리’가 빠지고 ‘공무원 헌장’으로 개정되었다. 새 헌장은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며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며 ‘창의성’, ‘전문성’, ‘다양성’ 등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게 고쳤다. 타율성에서 자율성으로 바뀐 것이다.
아울러 사생활 보장과 비효율적인 근무 문화를 개선하려는 제도적 조치도 마련되고 있다. 최근 부산 동래구의회는 근무 시간 이후에는 급하지 않은 업무 연락을 금지하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자연 재난이나 사회적 재난, 당직, 비상근무와 특별한 행사 때 사전 협의로 조율된 경우는 예외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상황이 바뀌고 근로와 사생활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해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규정이 마련되는 등 근무 환경에 제도적 변화가 일고 있다. 다만 이러한 추세가 공무원으로서의 본분을 흐리거나 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작가는 이번 해킹 사건으로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왜 힘들어야 하나’하는 의문을 품었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은 국민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든든한 버팀목이요 단단한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국민과 공무원 서로의 인식은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되며 공유되어야 할 것인가? 공무원은 언제나 보초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국민이 공무원을 보는 눈은 ‘할 일 없는 보초’로 인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