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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 인(人)자 다섯 개
    가을 산에 오르면 자연의 신비를 새삼 느낍니다. 무성하게 하늘을 덮고 있던 나뭇잎은 나무마다 다른 모습으로 제 어미를 보호합니다. 벚나무나 배롱나무는 벌써 앙상한 가지만 흔들고 있고, 단풍나무나 참나무잎은 색색이 물들어 이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나무 잎은 더 푸르러 가을 햇살을 튕겨내고 있습니다. 나무들마다 그들답게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을 봅니다. 떡갈나무가 소나무를 흉내 내지 않고, 소나무가 떡갈나무를 흉내 내지 않고, 단풍나무가 떡갈나무를 흉내 내지 않습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답게, 떡갈나무는 떡갈나무답게, 단풍나무는 단풍나무답게 삽니다. 아침이면 부춘산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합니다. 길가엔 온갖 쓰레기가 널려있습니다. 휴지는 물론이고 깡통이나 빈 병도 보입니다. 쓰던 마스크도 보입니다. 보는 대로 강아지 배설물을 담을 봉투에 주워 담습니다. 때로는 더 담을 수 없어 그냥 지나칠 때도 있습니다. 잠시 마음속으로 갈등합니다. 놔둬라. 어르신들(일자리 사업)이 주울걸, 하면서도 께름칙합니다. 참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리는 사람은 누구고 줍는 사람은 누군가? 버리지 않으면 줍는 일도 없지 않겠나? 그럼 어르신들 일자리는 어떻게 하고? 그거야 농촌 일손돕기를 하면 어떨까? 지금 농촌에는 일손이 부족해 야단이다. 건강과 시간에 맞춰 약하신 분은 쉽고 단순한 일을, 건강하신 분은 거기에 알맞게. 시간도 30분, 1시간, 아니면 8시간, 능력에 따라 시간 단위로 정해서 일하고, 노인 일자리 사업에 정한 예산을 집행하면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숲속에 들어섰습니다. 나무는 각자 ‘답게’삽니다. ‘무엇 무엇답다’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답게 사는 것이,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도 나무들처럼 그렇게 ‘답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돌아와 ‘답다’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국어 대사전에는‘일부 명사나 명사구 또는 어근의 뒤에 붙어, 그것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이 있다는 뜻을 더하여 형용사를 만드는 말’로 풀이하였습니다. 만일 세상이 모두 ‘답게’만 산다면 법도 필요 없을 듯합니다. 이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답지 않게’ 살기 때문입니다. 위정자는 위정자답게, 국민은 국민답게, 사장은 사장답게, 사원은 사원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군인은 군인답게 경찰은 경찰답게, 목사는 목사답게 성도는 성도답게……. 한도 끝도 없이 ‘답게’를 붙여 그대로만 산다면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문득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잠시 다녔던 서당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람 인(人)자를 다섯 자 붙여 써놓으셨습니다. 人人人人人. 설명하시기를 “사람(人)이면 다 사람(人)이냐 사람(人)이 사람(人)다워야 사람(人)이지” 미국의 한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너희는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의 포부를 말했습니다. 어느 아이는 위대한 과학자가 되겠다, 어느 아이는 큰 사업가가 되겠다, 또 다른 아이는 훌륭한 정치가. 위대한 예술가 등 자기의 포부를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때 가만히 앉아있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놀란 선생님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큰일을 하고 이름을 떨친다 해도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면 동물과 다를 바 없으므로 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 아이가 훗날 미국의 20대 대통령인 ‘제임스 A 가필드’라고 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 찾아낸 글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건 바로 동물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리를 지켜 사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줍다 보면 담배꽁초와 담뱃갑이 제일 눈에 거슬렸습니다. 흡연이야 기호 식품이니 뭐라 간섭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걸 길바닥에 버리면 누가 줍나요? 대한민국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선진국 국민은 선진국 국민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인자(人字) 다섯 개를 되새겨 봅니다./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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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5
  • 체납처분 면탈 목적 재산 은닉·탈루시 위법 여부
    [개요] 납세의무 성립 전에 체납처분 면탈 등 목적으로 재산을 은닉·탈루한 경우 조세범처벌법 제7조 제1항 위반죄가 성립되는지 문제된 사건 (대법원 2022. 9. 29. 선고 2022도5826 판결) [사례] 피고인 갑이 그 소유의 분양권을 타인에게 매도하고 매매대금을 수령하여 양도소득세 납세의무가 부과될 것이 예상됨에도 체납처분을 면탈할 목적으로 같은 날 매매대금을 피고인 을에게 증여함으로써 재산을 은닉·탈루하고, 피고인 을은 피고인 갑의 위 행위를 방조하였다는 사실로 피고인 갑, 을에 대하여 조세범처벌법 위반죄로 기소된 사안. [대법원 판단] 「조세범처벌법」 제7조 제1항 위반죄는 납세의무자 또는 납세의무자의 재산을 점유하는 자가 체납처분의 집행을 면탈하거나 면탈하게 할 목적으로 그 재산을 은닉·탈루하거나 거짓 계약을 하였을 때에 성립한다. 국세기본법 제2조 제9호는 “납세의무자란 세법에 따라 국세를 납부할 의무(국세를 징수하여 납부할 의무는 제외한다)가 있는 자를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제21조 제1항은 “국세를 납부할 의무는 이 법 및 세법이 정하는 과세요건이 충족되면 성립한다.”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조세범처벌법」 제7조 제1항 위반죄의 주체인 ‘납세의무자’는 면탈하고자 하는 체납처분과 관련된 조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는 자를 의미하고, 그 ‘납세의무자’로서의 지위는 국세기본법 제21조에 규정된 ‘과세요건이 충족된 때’에 성립한다.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는 권리의 양도에 따른 양도소득세는 과세표준이 되는 금액이 발생한 달, 즉 양도로 양도차익이 발생한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는 권리의 양도일이 속하는 달의 말일에 소득세를 납부할 의무가 성립한다. 여기에서 양도는 대가적 수입을 수반하는 유상양도를 가리키고 소득세법 제98조, 같은 법 시행령 제162조에 따르면 양도일은 대금을 청산하기 전에 소유권이전등기를 하는 경우 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금이 모두 지급된 날을 가리킨다(대법원 2022. 7. 14. 선고 2019다281156 판결 등 참조).    따라서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는 권리 양도인에게 ‘양도소득세 납세의무자’의 지위는 위 국세기본법 규정에 더하여 소득세법령에 따라 양도목적 재산의 대금을 모두 지급받은 날이 속한 달의 말일에 성립한다. 이러한 판단기준에 따라서 대법원은 조세범처벌법 제7조 제1항 위반죄의 주체인 ‘납세의무자’는 면탈하고자 하는 체납처분과 관련된 조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는 자를 의미하고, 납세의무자의 지위는 과세요건이 충족된 때에 성립하며, 양도소득세 납세의무는 소득세법령에 따라 매매대금을 모두 지급받은 날이 속한 달의 말일에 성립하므로, 양도소득세 납세의무가 성립되기 전인 매매대금 수령일 당일에 위와 같은 행위를 한 피고인 갑, 을에 대하여 조세범처벌법 위반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 자료제공 :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산출장소 (041-667-4054, 서산시 공림4로 22, 현지빌딩 4층, 전화법률상담 국번없이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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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5
  • “이러다가는 다 죽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123조 제1항은 ‘국가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농·어촌종합개발과 그 지원 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제4항은 ‘국가는 농수산물의 가격안정을 도모해서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한다’며 국가가 나아가야 할 농업정책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농어업을 볼모로 수없이 많은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서 농어업소득은 점점 줄어만 가고 농어촌 지역의 인구소멸을 부추기고 있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농가인구는 2000년도 403만 명에서 225만 명으로 감소했다. 도시근로자 평균임금 대비 농어가 소득 비중도 2000년도 80.5%에서 현재 62%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이처럼 도시와 농어촌 빈부격차는 농어촌 소멸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를 막기 위해 전국 시도에서는 농어민 공익수당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연 40만 원에서 80만 원까지 수당을 지급하며 도시와 농어촌 간의 소득격차를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서산시의 경우 가구당 80만 원을 지원하고 있으며, 2020년 116억 원, 2021년 119억 원, 2022년 127억 원 중 60%를 시비로 부담하고 있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마다 지급기준과 지급액이 다르고, 광역시에 포함되는 농어업인은 배제되기 때문에 농어민 간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형평성 문제뿐만 아니라 지역 간 지원액 줄세우기식 경쟁을 조장해 지자체들은 상당한 재정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절실한 상황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농어민수당 관련 법안이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이다. 농어업의 공익적 가치를 지키고 도농 간 소득격차를 완화해 농어촌 소멸을 막기 위해 정부가 신속히 관련법을 마련하고 농어민수당을 정부 정책화해야 할 것이다. 농어업은 생명산업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식량안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환경보전, 대기 정화 등 농어업의 공익적 가치 또한 여러 연구를 통해 해가 지날수록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정책은 엇박자를 내며 농어업 죽이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에미상 수상으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오징어게임의 한 대사가 생각난다. “이러다가는 다 죽는다.” 안원기(서산시의회 산업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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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7
  • 상차림의 백미(白眉)는 백미(白米)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연탄 때문인지 방바닥은 뜨거운데 코는 시렸다. 이불을 코밑까지 최대한 끌어 올렸다.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아버지의 코골이는 계속됐지만, 익숙한 듯 나도 모르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이면 작고 둥근 상 정중앙에 올려진 김치찌개. 그리고 하얀 쌀밥이 놓여 있었다. 찌개의 시큼 알싸한 향과 쌀밥의 구수함이 단칸방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는 나의 마음과 심장, 그리고 육체를 튼튼히 했다. 시월의 가을, 풍요의 땅. 어머니 품을 닮은 그곳에서 지난 시절은 추억됐고 다음 세대는 걱정이 됐다. (CH2O)n 탄수화물의 화학구조는 탄소, 수소, 산소의 결합체, 천연고분자 화합물이며 에너지원이다. 백미의 낟알 무게는 약 20mg, 밥 한 공기를 약 200g으로 치면 한 번에 약5,000개 미만의 쌀을 먹는 셈. 과하면 독, 결핍도 문제. 다이어트는 개인적 문제. 차치하자. 우리 역사 속에서 쌀은 더불어 사는 생활 공동체의 근간을 형성했고 서로 돕고 돕는 문화다. 두레나 품앗이는 공동 노동조직이며 농경문화 생성의 기반, 이를 파괴시킨 일제 강점기 약탈 농업정책은 군량미 조달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지금의 농업정책, 쌀 소비량의 추세와 전망에 따라 예측하는 것이 정책의 기본이다. ‘쌀값이 여전히 높다’는 인식은‘시장 최저가 입찰방식’을 탄생시켰고 쌀값은 폭락했다. 과연 누가 본업을 뒷전으로 제쳐놓고 서울로 상경한 농민들을 탓하랴. 뒤늦은 후회, 한발 늦어버린 시장격리 조치는 쌀값을 잡기에 역부족이었다. 쌀값은 4만393원, 하락세로 접어들기 직전 5만6,803원과 비교해 28.7%나 하락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논농사를 밭농사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인책도 써봤다. 논 타작물 재배지원사업. 논 면적은 단 3.8% 감소하는 데 그쳤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두고는 여야가 대립양상이다. 양곡법 개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3% 이상이거나 쌀 가격이 5% 이상 떨어지면 정부가 생산량 일부를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것. 법적으로 농민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좀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했으면 한다. 궁극적인 방법은 쌀소비를 늘릴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어떨까? 농업정책은 쌀 경쟁력 향상에 있다. 다양한 연구와 적극적인 투자로 품질 개량에 성공하고 쌀 섭취가 단순한 에너지원을 넘어 기능성 쌀로의 인식 대전환이다. 국수, 빵 등 가공 방식을 늘리고, 먹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산업 분야로 외연을 확장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농림축산식품부의 가루쌀(분질미) 전량 공공비축미 매입 결정을 환영한다. 가루 쌀은 기존 쌀과 달리 물에 불리지 않고 밀처럼 빻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쌀이다. 지역별로는 전남북이 각각 18곳, 13곳으로 가장 많고, 충남 6곳, 경남 2곳이 선정됐다. 큰 기대를 해본다. 쭉 뻗은 도로 옆, 반듯하게 구획된 농지로 잘 익은 벼가 풍족하게 들어차 있다. 한여름 태양이 주는 빛과 대지의 양분을 흡수하여 자란 결실들. 다행히도 필자가 사는 지역은 가을 태풍도 피해 갔으니 풍년은 풍년이리라. 그래도 마냥 기쁠 수는 없다. 추수를 앞두고 전전긍긍해 하는 농민들의 불안한 기색이 눈에 선해서일까? 눈에 보이는 것과 그것의 본질은 또 다른 문제다. 어머니의 손맛이 깃든 김치찌개와 하얀 쌀밥. 그때도 상차림의 백미(白眉)는 백미(白米)였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래도 좋다. 누가 뭐래도 쌀밥은 여전히 우리 밥상의 주연이다. 농민들이여, 힘을 냅시다. 그동안 힘들었지만 주연을 잘 길러냈으니 더 좋은 주연을 만들어 봅시다. 꼭 그렇게 합시다. 잘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혼잣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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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7
  • 책 덮은 나라, 이래도 될까?
    가을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파란 하늘은 저 멀리 올라가 있습니다. 감나무에는 주렁주렁 홍등을 매달아 가을을 밝히고 있고, 들녘엔 온통 황금색 벼 이삭이 수확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과 들녘을 보면 ‘천고마비’란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님을 실감하게 됩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말이 또 하나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마치 철 지난 유행 옷처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책 덮은 대한민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J신문 문가영 기자가 쓴 ‘종이책 접었다. 성인 절반 1년간 한 권도 안 읽어’란 기사를 읽으며 “이래도 될까?”라는 무거운 마음이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지난 9일 통계청에 따르면 20대 연평균 독서량은 2011년 18.8권에서 지난해 8.8권으로 10년 새 절반 이하로 급격히 감소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10대는 연평균 독서량이 22.2권에서 13.1권으로 20대에 이어 전 연령 중 두 번째로 큰 감소폭을 보였다고 하니 정말 ‘이래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덮은 대한민국은 지난해 교과서나 참고서를 제외한 일반 도서를 한 권 이상 읽은 성인의 비율은 46.9 퍼센트에 그쳤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이 전체 성인의 절반이 넘는 셈입니다. 2011년 1년에 책을 한 권 이상 읽은 독서인구가 10명 중 7명 이상이었던 걸 보면 얼마나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는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찌 책뿐이겠습니까? 종이 신문도 처지는 마찬가지입니다. 2011년 신문을 정기 구독하는 가구는 전체의 15.7 퍼센트였으나 2019년에는 2.1 퍼센트로 쪼그라 들었습니다. 이는 모두 스마트 폰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을 통해 뉴스 기사를 접하는 인구는 크게 늘었습니다. 지난해 스마트 폰을 통해 뉴스 기사를 소비하는 인구 비율은 92.6 퍼센트에 달했습니다. PC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인구의 4.7 퍼센트를 합치면 국민 절대다수가 온라인에서 뉴스를 보는 셈입니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온라인에서만 정보를 얻으면 각자 입맛에 맞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이 강화되어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없다고 염려합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해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대한민국. 책 덮은 대한민국. ‘이래도 되는 걸까요?’ 필자도 얼마나 책이 인기 없는가를 실감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 10월 7일부터 사흘간 제19회 해미읍성 축제가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막혔던 대회가 3년 만에 열린 축제였습니다. 굶주렸던 나들이 욕구를 단번에 채우려는 듯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넓은 성안 가득 찬 관광객들은 각자 호기심 있는 곳에 몰려다녔습니다. 부스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곳, 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의 부스만은 예외였습니다. 파장처럼 한산했습니다. 그곳에는 지역 문인들이 쓴 문집과 회원들이 출간한 책을 무료로 배포하거나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무국장은 “필요하시면 가져가십시오. 그냥 드립니다”라고 사정하듯 권했습니다. 그 소리에 발길을 돌려 더러는 가져갔지만, 10.000원이라 가격표를 붙인 코너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공짜로 드린다는 말에 어느 부인이 하는 말 “집에 있는 책도 다 못 보는데 가져다가 뭐해요?” 이 말이 왼 종일 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판매하는 책은 해미읍성을 소재로 쓴 김가연 시인의 디카 시집과 필자가 쓴 신앙시집이었습니다. 장소가 해미읍성이니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해미읍성을 다녀간 좋은 기념품이 될 터인데…, 교황이 다녀간 성지인데 신앙시집 한 권쯤 가져가도 좋을 텐데…. 그건 필자의 좁은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변하게 하고 사람을 바꾸게 한다는데 도무지 읽지 않는 책이 무슨 수로 세상을 변하게 하고 사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안중근 의사가 오늘을 보신다면 뭐라 하실지요. 그래도 여덟 권을 팔았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딱 한 사람이라도 내가 쓴 글로 인해 삶을 바꿨다면, 딱 한 사람이라도 내가 쓴 글에 밑줄 그으며 감동할 수 있다면, 아니, 한 사람의 독자가 있다면 그를 위해 기꺼이 글을 쓰겠습니다. 판도라 상자의 맨 밑에는 날아가지 못한 작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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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7
  • 아직도 꿈이 있습니까?
    얼마 전 민태원기념사업회(회장 김가연)에서 주최한 우보 민태원 학술제에 참석했습니다. 우보 민태원은 우리나라 근대 언론의 초창기에 활약한 대표적 언론이었지만, 그에 대한 연구물이나 남겨진 자료들이 많지 않습니다. 서산이 낳은 위대한 문인 중 한 분이지만. 선생이 음암면 출생이라는 것과 교과서에 나오는 「청춘 예찬」의 저자라는 것 말고는 고향에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문인입니다. 이제 그를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그분의 생애와 그의 작품을 조명하여 서산을 빛낸 위대한 문인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어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는 「우보 민태원, 청춘을 노래하다」라는 산문. 자료집을 내어 선생을 기렸거니와, 올해에는 그 두 번째 사업으로 우보 민태원 학술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연구 발표자는 한국 기술문화연구소 박덕규 소장님을 비롯하여 최수웅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와 나소정 문학 평론가 등이었습니다. 모두 충실한 연구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우보의 진면목(眞面目)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보 민태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수필 ‘청춘 예찬’일 것입니다. 이 청춘 예찬은 언제 읽어도 가슴 벅차오르고 젊은 날 느꼈던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보 민태원 선생은 청춘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청춘은 인간의 동산에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핀다고 했습니다.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청춘을 꼭 나이로만 가둬둘 수 있겠습니까?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탁월한 정신력을 뜻한다며,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라도 늘 푸른 청춘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에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이상이 있는가? 꿈이 있는가? 풍부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있는가? 용기가 있는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는 꿈틀대는 꿈이 있고 이상이 있고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청춘이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청춘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학술제를 마치고 난 후,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서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제가 청춘입니까?”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주책없는 생뚱맞은 질문에 모두 웃었습니다. 그때 박덕규 소장이 대답해주었습니다. “묻는 사람은 청춘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문현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이 인정한다고 해서 청춘이 아닙니다. 청춘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내 안에 이상이 있고 꿈이 있고 뜨거움이 살아있다면 누가 뭐래도 청춘입니다. 이상과 꿈과 용기와 열정이 있다면 청춘입니다. 우보 민태원 선생은 힘차게 고동치는 거선(巨船)의 기관과 같은 청춘을 예찬하여 나라를 잃고 절망의 늪에 빠진 이 땅의 청년들에게 이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청춘들에게 힘차게 노래하며 힘차게 약동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실의에 빠져있던 당시의 청춘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누군가 청춘 예찬론은 이제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기 침체, 양극화로 20~30대 기초생활수급자가 가파르게 늘어난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코로나19가 할퀴고 간 상처는 전 세계를 신음의 구덩이에 몰아넣었습니다.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일제 강점기를 견뎌냈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보릿고개를 넘겼습니다. IMF 구제 금융의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우리 민족은 꿈을 이루는 민족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무 소망도 꿈도 없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청춘을 노래한 우보 민태원 선생. 인생 황혼기의 나이로 청춘의 시를 쓴 사무엘 울만.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던 요셉.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상과 꿈이 있어 그들은 청춘이었습니다. 그대여! 아직도 꿈이 있습니까? 꿈이 있는 한 그대는 틀림없이 청춘입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소리 높여 청춘을 예찬합시다. 청춘 만세! <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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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0
  •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무주의 맹시(無注意 盲視)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를 증명한 이들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와 일리노이대학의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입니다. 이들은 이른바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동영상으로 이를 증명하였습니다.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이리저리 움직이며 농구공을 패스하게 하고 이 장면을 촬영하여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한 팀 학생들은 흰색 셔츠, 한 팀 학생들은 검은색 셔츠를 입게 했습니다. 동영상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는 흰색 셔츠 팀의 패스 횟수를 세라고 지시했습니다.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무려 9초 동안 가슴을 두드리며 지나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청하던 수천 명의 학생 절반 정도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릴라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우기기까지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의 실험을 통해서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라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필자도 얼마 전에 이런 무주의 맹시를 경험하였습니다. 매주 목요일에는 모 주간 보호 센터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집사님 한 분에게 부탁하여 특별 찬양 순서를 넣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임박하여 문득 그 집사님이 코로나 후유증으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를 드렸으나 응답하지 않아 그대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액정을 보니 그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배 중이기 때문에 거절 신호를 보내고 그대로 예배를 진행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 집사님의 상태가 궁금하여 전화를 걸었습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 집사님의 음성이 싸늘했습니다. 나온 대답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더니 그 집사님은 예배 장소에 왔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들려오느라 조금 늦었지만, 분명히 예배 장소에 왔었다고 합니다. 그때 필자는 설교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본인이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어른들 옆 공간에서 여러 번 오가기를 반복했다고 하였고 심지어 자기 쪽을 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못 보았다고 했으나 어떻게 못 볼 수가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구차한 변명 같아서 정말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미안하게 되었다며 사죄했습니다. 보지 못한 잘못은 전적으로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집사님은 “못 보셨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요”라는 말에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설교 중에는 듣고 있는 어르신들에게만 집중합니다.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관심이 없습니다. 요양보호사들이 왔다 갔다 해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당연히 그 집사님도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지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어찌 시각뿐이겠습니까?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맹신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본 것, 자기가 들은 것이 확실하다고 단정합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는 윤 대통령의 방미 중 발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사실을 놓고 여(與)와 야(野)가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이는 바로 자기들이 듣고 싶은 대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전제되지 않는 기사는 기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논란거리 기사는 사회적 혼란만 불러올 뿐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주의 맹시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이 틀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를 경계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편견과 아집과 맹신일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눈,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가 있는 한 사회적 갈등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쇠락의 길을 가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고 한다면 훨씬 더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시인·소설가·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2-10-04
  • 대기발령과 해고의 인사권 남용 여부
    [개요] 근로자의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 불량 등을 이유로 행해진 대기발령 및 해고의 정당성 유무가 문제된 사건 (대법원 2022. 9. 15. 선고 2018다251486 판결) [사례] 피고(사용자)는 원고(근로자)에게 인사평가의 불량 등을 이유로 대기발령을 하였으나 원고가 그 후 3개월 동안 계속하여 저조한 업무수행평가를 받아 보직을 부여받지 못하자 취업규칙 및 인사규정의 ‘사원이 무보직으로 3개월이 경과하였을 때는 해고한다’는 규정에 따라 원고를 해고하였음. 이에 원고는 이 사건 대기발령과 이 사건 해고가 인사권 남용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 대기발령 및 이 사건 해고의 무효 확인과 대기발령 기간 동안의 임금 차액 및 해고 시로부터 복직하는 날까지의 임금의 지급을 청구하는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사안. [대법원 판단] 대기발령이 정당한 인사권의 범위 내에 속하는지 여부는 대기발령의 업무상 필요성과 그에 따른 근로자의 생활상 불이익의 비교교량, 근로자와 협의 등 대기발령을 하는 과정에서 신의칙상 요구되는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 등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고, 근로자 본인과 성실한 협의절차를 거쳤는지는 정당한 인사권 행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한 요소라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한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였다는 사정만으로 대기발령이 권리남용에 해당되어 당연히 무효가 된다고는 볼 수 없다(대법원 2005. 2. 18. 선고 2003다63029 판결 등 참조). 근로기준법 제23조 제1항은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를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여 해고를 제한하고 있다. 사용자가 취업규칙에서 정한 해고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할 때에도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용자가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이 불량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에 해고할 수 있다고 정한 취업규칙 등에 따라 근로자를 해고한 경우, 사용자가 근로자의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이 불량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되는 평가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근로자의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이 다른 근로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정도를 넘어 상당한 기간 동안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최소한에도 미치지 못하고 향후에도 개선될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등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인 경우에 한하여 해고의 정당성이 인정된다. 이때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인지는 근로자의 지위와 담당 업무의 내용, 그에 따라 요구되는 성과나 전문성의 정도, 근로자의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이 부진한 정도와 기간, 사용자가 교육과 전환배치 등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 개선을 위한 기회를 부여하였는지 여부, 개선의 기회가 부여된 이후 근로자의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의 개선 여부, 근로자의 태도, 사업장의 여건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21. 2. 25. 선고 2018다253680 판결 참조). 이 사안에서 대법원은 ➀ ‘이 사건 대기발령의 무효 확인 및 대기발령 기간 동안의 임금 차액 청구’에 대하여는, 이 사건 대기발령이 피고의 조직 개편 및 인사고과평가에 따른 것으로서 정당한 인사권의 행사라고 판단하였으나 ➁ ‘이 사건 해고의 무효 확인 및 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 청구’에 대하여는, 원심이 원고의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의 부진이 어느 정도 지속되었는지, 그 부진의 정도가 다른 근로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정도를 넘어 상당한 기간 동안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최소한에도 미치지 못하는지, 나아가 향후에도 개선될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려운지, 피고가 원고에게 교육과 전환배치 등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 개선을 위한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였는지 등에 관하여 제대로 심리하지 않은 채 단지 이 사건 대기발령이 정당하고 대기발령 기간 동안 원고의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건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단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이 부분 원심판결을 파기 환송하였습니다. - 자료제공 :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산출장소 (041-667-4054, 서산시 공림4로 22, 현지빌딩 4층, 전화법률상담 국번없이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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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4
  • 서산타임즈를 훈수한다. - 창간 17주년을 축하하며 -
    월요일이면 우편함에서 <서산타임즈>가 기다린다. 고향의 공기가 묻어온 신문을 펴는 순간 독특한 향기가 번진다. 짚어가며 읽는다. 무엇인가 인터넷 기사만으로는 볼 수 없는 부분을 종이신문이 채워준다. 시차를 두고 인터넷과 종이 신문 두 가지를 결합한 방법으로 볼 수 있으니 언론매체로써는 강점이다. <서산타임즈>가 ‘끝없는 서산 사랑, 건강한 지역신문’을 표방하며 17개성상의 금자탑을 쌓았다. ‘서산 뉴스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지향점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읽을 때마다 공정한 시각, 객관적 보도가 와 닿는다. ‘서산 사람 성향’을 닮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다. 언론의 사명 정론·직필의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서산타임즈>는 꿋꿋하게 역할을 다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점점 열악해지는 언론 생태계, 더욱이 지역신문이 마주하고 있는 척박한 여건에서 이만큼 이끌어 온 것은 제작진의 눈물겨운 노력과 시민들의 성원으로 써내려온 서산의 역사다. 뉴스 보도 차원을 넘어 널리 알리는 일에 기꺼이 나서고 있다. 창간 당시부터 이·통장,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은 물론 출향인사들에게까지 신문을 보내주고 올해부터는 경로당과 노인대학에까지 확대하였다. 역시 창간하던 해부터 ‘시대정신을 선도하고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빛나는 성과를 올린 인물’을 골라 시상하는 ‘자랑스런 서산인 상’은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걸어 온 길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를 훈수해본다. SNS시대 지역신문이 가야 할 방향의 하나이기도 하다. 손바닥에 들어가는 스마트 폰으로 웬만한 것은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이에 대응하자면 무엇보다도 독자에게 꼭 필요한 신문, 독자의 더 구미에 맞는 신문, 독자로부터 기꺼이 선택받는 신문이어야 한다. 취재원이 제공하는 자료, 당사자들이 중요시하는 아이템이 아니라 독자의 욕구와 필요에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지역신문에서만 볼 수 있는 기사를 만들어야 한다.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다. 지금도 마을 소식을 찾아 보도하고 있다. 더 바짝 다가가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확대경으로 보는 기사. TV에서 보는 ‘인간극장’ 같은 이야기. 취업, 결혼, 출산, 보육에 얽힌 이야기도 좋다. 작지만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이야기가 살아있는 기사가 된다. 대규모 행사나 뉴스 못지않게 작지만, 관심을 끌 수 있는 기사도 필요하다. 일상생활과 생업에 이익이 되는 기사, 불이익을 막을 수 있는 소식에 비중을 늘려야 한다. 시민, 출향인사 모두 기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구성도 생각할 수 있다. 변호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좋은 글을 쓰고 있다. 오피니언 칼럼도 다양해지고 있다. 앞으로 세무사, 회계사, 노무사, 공인중개사 등 각계 전문가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방안을 모색하면 좋을 것이다. 알맹이 있는 글감으로 생생한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진으로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도 바람직하다. 기사를 풍부하게 하는 지역 기자가 활동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청년 기자를 찾아 탄탄한 인력으로 육성하기 기대한다. 아울러 서산문화원에서 발간하는 도서와 ‘스산의 숨결’, 서산향토연구회의 ‘서산의 문화’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에서 펴내는 귀중한 향토역사문화 자료가 많이 있다. 좋은 내용을 제휴 기사로 실어 널리 알리는 방법도 있다. 하나의 ‘거리’가 기사화 될 때 까지는 많은 과정을 거친다. 취재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처럼 산고를 겪고 나온 기사가 일회용 소모품이 아닌 생명력 있는 기사, 보도된 내용은 후속 상황을 찾아 ‘끝장을 보는’ 기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경종이 되고 촛불이 된다. 어제 만나고 오늘도 마주하며 내일도 피할 수 없는 지역사회에서 ‘무엇을’ 지적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나 사명감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때로는 어떤 불이익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론의 기본 사명은 무엇인가? 존재 이유는 또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아무나 할 수는 없는 기능과 사명은 언론에 있다. 공직자들은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당사자도 이해하고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음지에 햇볕을 비춰야 곰팡이가 자라지 못한다. 그래야 사회가 건강하고 바로 서게 된다. 변화하는 미래를 밝혀주는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지역 소식과 여론을 한데 모으고 이끌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구심체가 필요하다. <서산타임즈>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지칠 줄 모르는 활약과 끝없는 전진을 기대한다.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전폭적인 성원은 필요충분조건이다. /가기천 전 서산시 부시장(ka12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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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7
  • 어둠 속 빛나는 샛별 같은 신문
    예전에는 먹을거리가 없어서 굶주렸습니다. 지금은 넘쳐나서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신문은 고사하고 구문만 보아도 반가웠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보의 홍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음식과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만 있으면 세계의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달됩니다. 온갖 언론 매체가 차고 넘쳐 오히려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힙니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과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신문을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이 신문은 단순히 뉴스의 전달 수단에만 머물지 않고 인터넷 신문이 주지 못하는 여러 가지 장점들이 있습니다. 신문은 보도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에 대한 해설과 독자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문화적 기능, 그리고 각종 유익한 광고 기능 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문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단순히 기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기사 속에, 그 문장 속에 들어 있는 함의를 느끼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이 신문은 제목만 보아도 대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게 해줍니다. 특히 자기의 관심거리 기사는 오려서 보관하여 훗날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점점 종이 신문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필자는 지역 언론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지금까지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은 것도 지역신문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행복한 서산 소식지’의 시민기자(제3기~6기)로, 2010년부터 2년여를 인터넷신문 ‘내포시대’에 논설위원으로, 그 후로 간간이 서산 지역신문에 시와 산문을 투고하였으며 2020년부터 1년간 ‘충남시대’에 논설위원으로 활동한 바도 있습니다. 그리고 2021년부터 서산타임즈에 ‘김풍배 칼럼’이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지역 언론사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언론사별로 차이는 있겠으나 느끼는 애로사항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역신문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재정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신문사의 주요 수입원은 구독료와 광고비와 독지가의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광고비와 후원금은 불확실한 수입원입니다. 주로 재정은 구독료에 의존합니다. 구독자의 확보도 쉽지 않거니와 각종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구독료의 인상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역신문은 민주 사회로 가는데 그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신문은 그 지역의 눈과 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신문은 중앙언론이 할 수 없는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과 지자체 행정의 감시와 홍보 및 이웃의 따뜻한 이야기까지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현안과 다양한 문화 행사를 소개함으로, 아름다운 지역사회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신문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자체의 지원제도 같은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듯싶습니다. 서산지역의 대표 정론지로 우뚝 선 서산타임즈가 창간 17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당시만 해도 지방지를 발간함이 그리 쉽지 않았을 터인데 17년이라는 세월을 이겨왔습니다. 더 경이로운 것은 1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한 번도 멈춤 없이 이어져 왔다는 점입니다. 지역신문으로서 환경이 갈수록 열악한 조건 속에도 굳건하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서산타임즈의 관계자 여러분의 투철한 사명감과 희생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서산타임즈는 지역사회와 함께하기 위해 취약 계층 무료 신문보내기운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군부대 장병, 이장을 비롯한 새마을 지도자와 부녀회장, 노인회장과 노인회관이 그 대상입니다. 더욱 많은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고 공유하여 지역사회의 단합을 이루고자 함이라 했습니다. 또한 출향 인사들에게도 신문을 보내어 고향의 소식을 듣도록 하여 애향심을 높여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매년 자랑스런 서산인 상 을 제정하여 5개 부문 포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사회적 경제 기업으로 인정받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 모두가 대표를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서산타임즈의 구독자분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서산타임즈 역시 여타 신문과 마찬가지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담을 덜어 보려고 신문 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신문은 좋은 구독자가 만듭니다. 십시일반, 힘을 모아 서산타임즈가 그동안 추구했던 일들이 계속되고 더 좋은 지역신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칼럼을 연재한 후 많은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신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도 실감했습니다. 더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매회 다짐하면서도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귀한 지면을 할애해 주신 서산타임즈 대표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부족한 글을 애독해주신 구독자 여러분께도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일찍이 토머스 제퍼슨은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라고 신문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습니다. 밝은 빛으로 사람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샛별 같은 신문, 어둠 속에 빛나는 지역의 정론지로 사명을 다하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서산타임즈의 17돌을 축하드립니다./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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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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