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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시가 달렸나?

김풍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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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3.05.2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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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과 무시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두 단어는 사촌 간처럼 여겨집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초에도 책을 내었습니다. 어김없이 지인들에게 많은 분량의 책을 우편으로 배송했습니다. 대부분 가까운 분이거나 같은 문학회 회원이거나 그동안 내게 책을 보내주신 분이었습니다.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꼼꼼히 챙겨 보내드렸습니다. 한 분 한 분 이름을 쓰다 보니 꼭 생각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의원님들이었습니다. 서산 시민을 위하여 수고할 뿐만 아니라 문학 하는 사람으로서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 애를 써 달라는 뜻도 있었습니다. 주소를 수소문해서 모두 집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대부분 보통 사람들은 책을 받고 문자나 전화로 인사표시를 해주십니다. 보통 우편을 이용하여 발송하기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했다가 문자나 전화를 받으면 안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의원님 한 분 이외는 누구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꼭 짜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선거 때엔 가을 낙엽처럼 마구 흩날리던 그 흔한 문자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기하면서도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책을 보내라고 했느냐고 따지면 할 말은 없습니다. 물론 인사를 받자고 보낸 건 아니었습니다. 또 보내 달래서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은근히 배신당한 기분도 들었고 무시당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나도 작가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입니다. ‘워낙 바쁘신 분들이니 그렇겠지’ 하며 마음을 돌렸지만 다시는 정치인에게 책을 보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웃과 이웃 사이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족 사이에도 무관심이라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자살률과 늘어나는 고독사는 어쩌면 무관심의 저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빌딩의 숲속에서 사는 도시의 사람들은 이웃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사는 게 다반사입니다. 급증하는 1인 가구의 증가와 무관심한 사회의 풍조 속에 고독사는 이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법까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소위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그것입니다. 지난해 4월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상대방을 가장 아프고 답답하고 숨 막히게 하는 가장 예의 바르면서도 잔인한 방법이 무관심이라 했습니다. 엊그제 지인이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과는 무관심하게 산다고, 그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문득, 우리는 무관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요?

 

러시아의 작가 투루게네프의 ‘거지’란 산문시가 있습니다.

 

‘길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늙어 빠진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눈물 어린 충혈 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더러운 상처…. 아! 아!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 먹는 것일까요?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날따라 지갑도, 시계도 없고 손수건마저 없었습니다. 당황한 나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고 이야기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파리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적선입니다.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거꾸로 이 형제에게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춘산을 오르다가 무심코 등산로 가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었습니다. 따끔해서 내려다보니 가시나무였습니다. 순간, 보잘 것도 없는 하찮은 수풀 속 야생나무 주제에 무엇 때문에 가시가 달렸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도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시하지 말라는 무언의 항거였습니다. 관심을 가져 달라는 호소였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로 유명한 엘리 위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고 무관심이다.’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요? 나는 얼마나 이웃에게,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돌아봤습니다. 나도, 나만 보며 살아왔습니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이웃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주지 못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의원들에게 가졌던 서운함도 날려버렸습니다. 당장 스마트폰을 꺼내어 나에게 문자를 보낸 여러분께 간단하게나마 댓글을 달았습니다. 모두 나에게 관심을 가지신 고마운 분들입니다. 관심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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