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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없는 사람

가기천의 일각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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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9.07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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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천.jpg
가기천(수필가·전 서산시 부시장)

 

갓난아기가 탯줄이 달린 채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어 충격을 주었다. 얼마 전 충북 청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나가던 시민이 쓰레기통에서 고양이 울음과 같은 소리가 들리자 뚜껑을 열었는데 뜻밖에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119에 신고하여 구조되었다. 무덥고 습한 날씨에 들끓는 벌레까지, 최악의 환경에서 67시간 동안 방치되어 목에서 등까지 피부 괴사가 진행 중이었다. 다행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탯줄에서 영양분이 공급되었기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아기는 막상 지자체나 복지단체로부터 아기용품을 지원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유는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있는 아기는 있지만 없는 사람즉 법 밖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출생신고 여부를 지원근거로 따진 공직자의 자세가 답답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복지사회의 꿈으로 여겼던 시대를 넘어 임신하기 전부터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사무적인 일처리 방식이 몸에 배어서 그럴까? 아마 목불인견의 상황에서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라 당황했거나 즉각 대응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의료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사회복지전산관리번호를 부여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제도가 있다면 여론이 일어나기 전에 지원하고 지자체와 병원 간 유기적인 협조가 재빠르게 이루어 졌다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법은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도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아울러 누구로부터 나를 보호받을 수 있다는 모두의 약속이기도 하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서 이웃이나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을 일컫는다. 요즘 법이 있어야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생겼다. 세상이 점점 어지럽다보니 법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으로부터 법 없어도 사는 사람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아기는 비록 철없는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하더라도 국가로부터 법 없이도 사는 사람으로 무조건 인정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공무원은 법에 따라 사무를 집행한다. 당연하다. 법은 행정행위의 기본이고 기준이다. 어긋나면 위법행위가 되어 문책을 받는다. 제멋대로 해석과 그릇된 집행을 막기 위해서다. 법과 규정에 정한 절차만 따르면 처벌 받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잘해보겠다고 한 일이 법과 규정을 벗어난 행위라고 인정되면 행정상, 신분상 불이익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위법은 물론이고 부당한 행위까지 문책 받게 되니 사리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적극행정을 강조하고, 일하다가 빚어진 과오는 관용한다고 독려해도 쉽게 정착되지 못한다. 공직사회에서 쉽게 풀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 당시 내무부장관이 위민행정을 제1의 역점시책으로 내세우면서 시·도청과 시··구청에 위민실을 만들었다. 법에 없는 민원까지 해결해 준다는 시책이었다. 종결된 고질 민원을 다시 꺼내야 했고, 사사로운 하소연을 들어주는 역할까지 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람에게는 여비까지 주었다. 나름 성과를 거두었는데, 지방행정기관으로서는 운영에 한계가 있어 문을 닫았다. 비록 한때의 시책이었지만, 법에 없고 어디에 호소할 곳도 없는 민원까지 보살펴 준다고 했던 그 취지는 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물며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에는 법의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번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위기 상황에 있는 어린이를 비롯한 병약자, 취약계층을 위해 매뉴얼을 점검하고 신축성 있게 대응할 수 있도록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업무를 숙지하고 즉각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법이 있어야만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세상이라면 너무 메마르다. 법 만능주의가 되어서는 살만한 세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번 일을 보면서 과연 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를 돌보지 않은 채 몸을 던지는 의인들은 법이나 의무 때문에 한 행동이 아니다. 하물며 공직자들은 그 존재이유를 잊지 않아야 하고, 법을 초월하는 인간애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나라가 있고 공무원이 있는 사회에서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있지만 없는 사람이 되고 만 어처구니없는 말은 다시 들리지 않아야 한다. 가기천/수필가·전 서산시 부시장(ka12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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