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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 시의회, 좋은 소식을 듣고 싶다
    좀처럼 비판적 기사를 쓰지 않는 <서산타임즈>가 연거푸 큰 지면을 차지하는 글을 냈다. 사안의 비중을 크게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서산시의회 관련 이야기다. 먼저 지난 4월 12일 자 “서산시의회 ‘싹수’가 필요하다”라는 글을 보자. ‘모든 음식의 맛이 다르듯, 정치 영역도 맛이 다르다. 권력 맛을 본 사람들은 그 맛을 아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맛을 알아도 본질적인 과업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지(知, 智)와 ‘싹수’가 필요하다. 지(知)와 지(智)는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그것을 올바르게 판별하고 처리하는 능력이다. 지금 서산시의회에 필요한 것은 ‘싹수’이다.’ 같은 날짜 “서산시의회 ‘왜 이러나?’”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의원 간 ‘막말’ 논란으로 갈등이 커지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의회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이어 5월 4일 자 ‘서산시의회 점입가경, 의원 간 고소로 확산’ 기사는, 내부에서 조정하여 마무리해야 일을 외부의 기능에 맡기는 현상이 지방자치의 현주소는 아닌지 걱정하게 한다. 지방의회가 30년 만에 부활한 지 다시 30여 년이 흘렀다. 이제 장년의 연륜을 쌓았고 나름 성장했다. 하지만 안건이나 지역 현안이 아닌 일로 갈등이 표출되고 밖으로 알려져 시민과 지역사회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인격이나 자질로 비화하고 나아가 지방의회 무용론까지 부추긴다면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 온 지방자치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지방의회의 성과를 부인할 수 없다. 지방의회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의와 가치가 있다. 시 공무원이 일할 때는 의회를 의식하면서 한 번 더 챙겨 보게 된다. 의회의 의결은 집행부가 하는 일을 ‘인정하고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서산타임즈> 이병렬 대표의 글 가운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시의원들의 일탈도 끊이지 않았다. A 의원은 시 고위공직자의 멱살을 잡고 막말한 의혹과 함께 의회 사무국 여직원에게까지 모욕적인 막말을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파장을 일으켰다. B 의원은 자신의 차량을 운전하다 주차된 차량과 접촉 사고를 내고도 그대로 현장을 떠나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시민들은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제9대 서산시의회 개원을 반겼다. 하지만 지난 10개월 동안 의원 간 다툼과 자질 문제, 갑질 논란으로 내홍을 겪었다. 상임위원회에서 일부 의원들은 턱을 괴고 질문을 하는가 하면 언성을 높이고 질문 후 답변을 듣지도 않았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훈계하듯, 수사기관이 범죄인을 다루듯 다그쳤다. 많은 공무원이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공무원을 통해 들은 시의원들의 자질과 갑질 논란은 부지기수이다.’ 공사 간 겸손하고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품위를 잃고 본분을 망각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마치 국회의원들이 청문회나 국정감사에서 국무위원이나 기관장들에게 호통치고 억지 부리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의원 자신은 턱을 괴고 버티는 자세로 질문하며 “자세를 바로해요”라거나, 민간인인 증인에게도 “팔짱 푸세요.”라고 소리친다. 무언가 자신이 없거나 비뚤어진 우월감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혹시 국회의원의 이런 장면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흔히 ‘국민의 대표’를 내세우는데 이럴 때는 ‘대표’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필자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지방자치의 기초 원리는 이렇다. 어느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이 살다 보니 길을 내야하고 공공건물을 지어야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모셔야 하고 교육시설이 필요했다. 행정공무원과 질서유지를 위한 보안관도 있어야 했다. 여기에는 비용이 얼마나 소요되고 이를 어디서 어떻게 충당할까 하는 방안을 논의해야 했다. 이러한 일을 모든 주민이 나서서 할 수 없으니, 대표자를 뽑았다. 대표자는 주인이 아니라 머슴이고 봉사자이어야 했다. 이런 원리로 접근하고 시민과 지역을 생각하며 마을 일 보듯 오순도순할 수는 없을까?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 런던 의회를 가 본 적이 있다. 의장은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보며 회의를 진행했다. 의원들은 긴 의자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토론했다. ‘권위’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지방의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방의원과 공무원은 한 고장에서 지역의 일을 수행한다. 다만 역할이 다를 뿐이다. 한편 시민, 의원, 공무원은 이런저런 ‘연’을 맺고 지내는 이웃이다. ‘연’이 공적인 관계를 흩트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상호 존중해야 한다. 공무원은 더욱 준비해야 한다. 의원은 겸손하고 진정 봉사자로서 헌신한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본연의 책무가 무엇인지 심사숙고하고 새 출발 한다는 각오로 신발 끈을 다시 매기 바란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더 큰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방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를 과연 유지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의문을 가져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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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5
  • 왜 가시가 달렸나?
    무관심과 무시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두 단어는 사촌 간처럼 여겨집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초에도 책을 내었습니다. 어김없이 지인들에게 많은 분량의 책을 우편으로 배송했습니다. 대부분 가까운 분이거나 같은 문학회 회원이거나 그동안 내게 책을 보내주신 분이었습니다.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꼼꼼히 챙겨 보내드렸습니다. 한 분 한 분 이름을 쓰다 보니 꼭 생각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의원님들이었습니다. 서산 시민을 위하여 수고할 뿐만 아니라 문학 하는 사람으로서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 애를 써 달라는 뜻도 있었습니다. 주소를 수소문해서 모두 집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대부분 보통 사람들은 책을 받고 문자나 전화로 인사표시를 해주십니다. 보통 우편을 이용하여 발송하기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했다가 문자나 전화를 받으면 안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의원님 한 분 이외는 누구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꼭 짜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선거 때엔 가을 낙엽처럼 마구 흩날리던 그 흔한 문자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기하면서도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책을 보내라고 했느냐고 따지면 할 말은 없습니다. 물론 인사를 받자고 보낸 건 아니었습니다. 또 보내 달래서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은근히 배신당한 기분도 들었고 무시당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나도 작가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입니다. ‘워낙 바쁘신 분들이니 그렇겠지’ 하며 마음을 돌렸지만 다시는 정치인에게 책을 보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웃과 이웃 사이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족 사이에도 무관심이라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자살률과 늘어나는 고독사는 어쩌면 무관심의 저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빌딩의 숲속에서 사는 도시의 사람들은 이웃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사는 게 다반사입니다. 급증하는 1인 가구의 증가와 무관심한 사회의 풍조 속에 고독사는 이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법까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소위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그것입니다. 지난해 4월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상대방을 가장 아프고 답답하고 숨 막히게 하는 가장 예의 바르면서도 잔인한 방법이 무관심이라 했습니다. 엊그제 지인이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과는 무관심하게 산다고, 그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문득, 우리는 무관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요? 러시아의 작가 투루게네프의 ‘거지’란 산문시가 있습니다. ‘길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늙어 빠진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눈물 어린 충혈 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더러운 상처…. 아! 아!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 먹는 것일까요?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날따라 지갑도, 시계도 없고 손수건마저 없었습니다. 당황한 나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고 이야기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파리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적선입니다.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거꾸로 이 형제에게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춘산을 오르다가 무심코 등산로 가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었습니다. 따끔해서 내려다보니 가시나무였습니다. 순간, 보잘 것도 없는 하찮은 수풀 속 야생나무 주제에 무엇 때문에 가시가 달렸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도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시하지 말라는 무언의 항거였습니다. 관심을 가져 달라는 호소였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로 유명한 엘리 위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고 무관심이다.’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요? 나는 얼마나 이웃에게,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돌아봤습니다. 나도, 나만 보며 살아왔습니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이웃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주지 못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의원들에게 가졌던 서운함도 날려버렸습니다. 당장 스마트폰을 꺼내어 나에게 문자를 보낸 여러분께 간단하게나마 댓글을 달았습니다. 모두 나에게 관심을 가지신 고마운 분들입니다. 관심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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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5
  • 서산의 천재 시인 ‘오청취당’을 기리며
    감히 그리고 짠한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조선 후기 서산의 천재 여류 시인 오청취당(吳淸翠堂·1704~1732) 이야기다. ‘감히’는 청취당의 생애와 시 세계를 깊이 있게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무엇인가 쓰고 싶은 욕구가 간절해서다. ‘짠함’은 녹록치 못한 삶 속에서 천부적인 문재를 미처 펼쳐보지 못하고 요서한 삶을 미루어 보며 갖는 마음이 하나요, 오 시인과 시인의 보석 같은 시가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있었음이 또 하나이다. ‘청취당’은 ‘성자의 맑은 성품과 대나무의 푸른빛을 취해’ 스스로 지은 아호다. 청취당은 경기도 평택 포승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세 살 된 남동생과 새어머니가 들어온 뒤 낳은 일곱 동생들까지 건사하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 집안일을 거두느라 길쌈과 바느질을 손에서 내려놓을 겨를이 없었다. 22세 때 서산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 마을의 김한량(金漢良)과 혼인하여 29세로 별세할 때까지 7년 동안 살았다. 결혼생활동안 두 자식을 잃었고 가난과 병마, 고독으로 몸부림치며 살다가 평소 그토록 동경하던 신선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청취당은 인생의 희로애락, 계절, 기상 등 모든 사물을 소재로 현실과 이상세계를 표현한 182수의 한시를 『청취당집(淸翠堂集)』으로 엮었다. ‘청취당집’은 1803년에 외손 박종규에 의해 편찬되었다. 규방규수인 청취당이 쓴 시를 보고 당대 문인들은 당나라의 문장가들과 견줘 비견할만하다고 했을 만큼 뛰어났다. 한문은 물론이고 수많은 경전과 고사에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어야 비로소 쓸 수 있을 만큼 넓이와 깊이가 있는 글로 가득하다. 청취당이 세상을 떠난 해는, 시댁과 같은 경주 김씨 가문인 정순왕후(1745~1805)가 태어나기 13년 전이다. 청취당이 생활한 마을은 왕후가 태어난 한동네이고 왕후는 시댁 조카 항렬이니, 청취당이 만약 환갑까지 살았더라면 당대에 이미 문향을 떨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을 가져본다. 청취당은 쇠잔한 양반 가문에서, 게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한 탓인지 우리나라 고전 문학사에 서는 생소했다.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 허난설헌, 김호연재 등의 배경이나 후광과 비교하여 보면 아쉽기만 하다. 다행히 최근 걸출한 여류시인으로 조명되고 있음은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청취당의 작품을 번역하여 알리는 계기를 만든 문희순 국문학박사는 “오 청취당은 역대 시화사나 문학사에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여성시인이나 그녀가 지은 작품을 볼 때 조선시대 유명 여류문인들과 비교해 볼 때 뒤지지 않을 정도의 높은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라고 했다. 청취당의 시비는 두 곳에 세워졌다. 하나는 음암면 유계리에 있는 ‘논우칠공(論友七功, 일곱 친구의 공로)’이고 또 하나는 팔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자탄(自嘆, 스스로 탄식하며)’이다. ‘논우칠공’은 바느질하는데 쓰는 바늘, 실, 인두, 다리미, 가위, 골무, 자를 통한 삶의 이야기이다. 규방문학의 대표적인 글로 알려진 ‘규방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가 바느질하는데 필요한 일곱 가지 도구가 서로 공을 다투는 장면을 그렸다면, 청취당의 논우칠공은 서로의 공을 치하하여 긍정적인 면을 표현했다는데서 그 차원이 다름을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규방칠우쟁론기와 또 하나의 침선도구인 바늘을 주제로 쓴 ‘조침문(弔針文)’보다도 훨씬 앞선 시대의 글로 그 의미를 더한다. ‘연적(硯滴)’은 곤륜산과 용을 끌어온 스케일과 은방울, 옥줄처럼 예쁜 낱말로 연적의 가치를 드러냈다. 더욱이 ‘문방사우’의 반열에 연적을 더하여 ‘문방오우’로 논의가 있음직한데 그 없음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형상과 사물을 주로 ‘삼(三) 또는 ‘사(四)’를 테두리로 묶는 세인의 관념이나 관행의 한계를 짚으며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연적 硯滴 誰刻崑精作妙硯 文房四友五成眞 搖揚口吐銀鈴散 傾瀉耳垂玉索伸 魚見若壺望救活 龍看似窟恨無雲 陶泓毛潁封功日 何不贈號此器論 “누가 곤륜산 정기 깎아 묘한 연적 만들었나?/ 문방사우 연적 더해 오우가 바른 것이지/ 흔들어대면 입으로 은방울 흩어 토해내고/ 기울이면 귀에서 옥줄 드리워 쏟아내네/ 물고기가 보면 병 같아 살려주길 바랄 터요/ 용이 볼 땐 굴속 같으니 구름 없음 한할 일 도홍과 모영에게 공을 봉하던 날에/ 어찌 연적에겐 호 내리는 의론 없었을까“ 이처럼 뛰어난 청취당의 문학을 재조명하고 서산 여류문학 활성화를 위하여 영정(影幀) 제작, ‘여성문학축제’ ‘휘호대회’를 비롯하여 지역 브랜드로 삼기 위한 콘텐츠 발굴을 기대한다. 5월은, 15일 아들 언주(彦柱)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요서하였으니 기림의 달이었으면 한다. 주 : 『역주 청취당집』 (문희순 역주, 2008, 서산문화원), ‘오청취당을 찾아가다’ (『태안문화』, 2019. 제31호, 최경자), ‘한국여성인물사전’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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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예술은 사회 발전의 근간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정신 작용이라 할 것입니다. 바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동물적 욕구만으로는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화가 생기고 예술이 생겼습니다. 문화예술은 창의성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그를 통하여 사회와 개인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립해줍니다. 그리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 더불어 경제적 가치도 창출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연설하던 중 조크로 던진 말. “내 이름은 들어 본 적은 없어도 BTS나 블랙핑크는 알 것이다. 그러나 BTS가 저보다 백악관을 먼저 갔지만, 여기 미 의회에는 다행스럽게도 제가 먼저 나왔다.”라고 하여 장내에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문화의 힘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일국의 대통령과 동급의 위치까지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민간 개인에게만 맡겨둔다면 아무리 개인적인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시나리오 작가가 생활고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11년 최고은 작가의 생활고로 인한 비극적 죽음에 당시 온 사회가 떠들썩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예술인의 복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소수의 사람이야 막대한 수익을 올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문화예술 분야의 종사자들은 수입이 충분하지 않거나 심지어 생계의 위협도 받게 되어 결국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문화예술의 열악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그해 10월에 예술인 복지법이 법률로 제정되었습니다. 이후 활발한 논의를 거쳐 2022년 9월 25일부터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이 시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란 속담도 있듯이 아무리 법률이 제정되고 보장한다고 해도 피부에 닿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여전히 예술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서산시에서는 4월 28일부터(30일까지) 충남 최초로 전문 예술인에게 창작 수당을 지급했습니다. 대상은 2023년 1월 1일 이전 6개월 이상 주소를 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발급한 예술활동증명 소지자에게만 해당하며 농어민 수당이나 기타 직업과 관련한 수당을 받는 자는 대상자 선정에서 제외하였습니다. 많은 분이 신청하였으나 중복수당지급자나 거주 기간 관계로 인하여 실제 대상자는 183명이었습니다. 지급대상자에게는 서산사랑 상품권 50만 원씩 지급되었습니다. 늘 새로운 길을 가려면 어려움이 따릅니다. 도전의 역사는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충남에서 최초로 시행되는 전문예술인창작수당을 지급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애로가 있었을까요? 바른길이란 확신이 아니면 쉽게 결단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정책을 결정하여 주신 시장님의 탁월한 예술 사랑 정신과 수고하신 관계자 공무원 여러분 그리고 문화예술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신 의원 여러분께 전문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50만 원이란 금액은, 크다면 크고 적다면 턱없이 부족한 돈입니다. 그러나 이번 서산시에서 지급한 예술인창작수당은 돈이 아니고, 자부심입니다. 자부심을 나눠준 것입니다. 예술인이라는 긍지를 심어 준 밑거름입니다. 전문 예술인으로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의욕과 책임감과 의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예술은 사회 발전의 근간입니다. 예술은 인간의 품격과 삶의 질을 올리는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감동을 주고 따뜻한 인간애를 갖게 하며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매개체요 징검다리입니다. 행복한 서산. 석양의 노을이 아니요,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해 뜨는 서산의 이름다운 문화예술이 꽃피는 예향의 도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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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공사로 인한 소음·진동 손해배상은?
    [요지] 공사로 인한 소음·진동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대법원 2023. 4. 13. 선고 2022다210000 판결) [개요] 원고는 앵무새를 사육·번식하여 판매하는 판매장을 운영해 왔는데, 피고 1 내지 4는 이 사건 판매장 건물 바로 옆 부지에 이 사건 건물 신축을 위한 건축허가를 받았고 피고 5, 6은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를 수행하였음. 원고는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 현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진동으로 이 사건 판매장의 앵무새가 폐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안. [대법원 판단] 공사현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진동으로 인근 제3자가 손해를 입은 경우 그 위법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소음·진동으로 인한 피해가 사회통념상 일반적으로 참아내야 할 정도(이하 ‘참을 한도’라 한다)를 넘는 것인지 여부이다(대법원 2019. 11. 28. 선고 2016다233538, 233545 판결 등 참조). 소음·진동으로 참을 한도를 넘는 피해가 발생하였는지 여부는 구체적으로 피해의 성질 및 정도, 피해이익의 공공성, 가해행위의 태양, 가해행위의 공공성, 가해자의 방지조치 또는 손해회피의 가능성, 공법상 규제기준의 위반 여부, 토지가 있는 지역의 용도와 이용현황, 토지이용의 선후관계 등 모든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소음·진동을 규제하는 행정법규는 인근 주민의 건강이나 재산, 환경을 소음·진동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하는 소음·진동에 관한 기준을 넘는지 여부는 참을 한도를 정하는 데 중요한 고려요소가 될 수 있다(대법원 2017. 2. 15. 선고 2015다23321 판결 등 참조).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주민의 건강 등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기준이므로, 그 기준을 넘어야만 참을 한도를 넘는 위법한 침해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고 그 기준에 형식적으로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피해의 정도가 현저하게 커서 사회통념상 참을 한도를 넘는 경우에는 위법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대법원 2014. 2. 27. 선고 2009다40462 판결 등 참조). 이러한 기준에 따라 대법원은, 피고들의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로 이 사건 판매장에 발생한 소음이 가축피해 인정기준에 도달하였거나 넘었다고 볼 수 있는 점, 원고가 위 신축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 사건 판매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왔다는 점, 흡음형 방음벽은 이 사건 건물 신축공사가 시작되고 6~7개월 후에 이루어진 조치인 점 등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원고의 피해가 사회통념상 참을 한도를 넘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피고들이 ‘소음·진동관리법 시행규칙’에서 정한 상업지역 생활소음규제기준을 준수하여 공사를 진행하였고 흡음형 방음벽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므로 피고들이 참을 한도를 넘는 위법한 행위를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 사례제공 : 박범진 변호사(상담전화 : 041-668-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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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어린이도 없고, 어버이도 없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 참으로 소중하고 간절한 달입니다. 마음껏 축하하고 위로받아야 할 날. 이렇게 경사스러운 달에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정말 싫습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써야 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상가(喪家)에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의 입구에 붙어 있는 상가안내문에 고인과 상주, 단 두 이름만 있는 상가가 있었습니다. 필자가 문상한 가정도 상주와 남동생 둘뿐이었고 동생은 나이가 오십은 넘어 보였는데 독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인을 여의어 슬픈데 쓸쓸함까지 깃드니 더욱 외로워 보였습니다. 문상하고 돌아와서도 고인과 상주 이름만 씌어있는 안내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인구 절벽 시대라고 합니다. 아예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해도 자녀를 하나만 낳거나 아예 갖지 않습니다. 2017년에 1.05 명이었던 출산율은 2020년 0.84 명, 이제는 0.78 명에 이르러 세계 최저 출산율이라고 합니다. 필자 같은 소시민은 급격한 인구 절벽으로 발생하는 노동력 감소나 경제 성장 둔화, 생산성 감소 같은 국가의 위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들어 보니 홀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재물도 있고 건강하면 혼자 산다는 게 더없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걸리는 것도 없이 새처럼 자유롭게 산다는 게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도 다 갈 수 있고, 좋은 차타고 좋은 음식 먹고…. 지인에게 우스개 같은 소릴 들었습니다. 요즘 결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이를 갖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한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그냥 우스갯소리라면 좋겠습니다. 보도를 보면 국내 1인 가구의 절반 가까이가 빈곤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특히 독거노인의 70%가 빈곤 상태이며 고독사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늙어 이 세상에 의지할 아무도 없는 혈혈단신이라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독은 어찌할 것이며 몸이 아파도 이마에 손 하나 얹어 줄 사람 하나 없다면 얼마나 서러울 것인가요? 아프면 혈육밖에 없고 기댈 데는 가족밖에 없다는 걸 살아 보니 알겠습니다. 한세상 살아 보니 순식간에 가버리는 게 세월이었습니다. 청춘도 잠깐이었고 십 년 세월도 순식간이었습니다. 건강도 자신할 수 없고 나이만큼 나빠지는 게 자연의 이치였습니다. 재물도 보충하지 않으면 밑 빠진 독이었습니다. 대가 끊긴다는 말이 어떤 건가를 보았습니다. 벌써 오십여 년 전 된 이야기입니다. 고향에 P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자녀를 여럿 낳았으나 공교롭게도 자식들은 열 살 이전에 모두 잃었습니다. 두 분만 사시다가 차례로 돌아가셨습니다. 상주가 없어 먼 친척분이 대신하는 걸 보았습니다. 이제는 집터마저 없어진 걸 보았습니다. 몇 천 년 이어온 가문이 사라진 것입니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후로 고인과 상주 하나 덩그러니 씌어있는 안내문을 보고 안타까운 상상이 오랫동안 머리를 어지럽혔습니다. 앞으로 독거노인, 1인 가구, 고독사, 상주 없는 상가 같은 피하고 싶은 단어들이 얼마나 우리를 슬프게 할까요? 혹자는 말합니다. 누구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 사는 줄 아느냐고. 누구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 안 낳는 줄 아느냐고. 오죽하면 혼자 살겠느냐고. 오죽하면 아이 없이 살겠느냐고. 하지만 오천 년 역사 속에 지금보다 더 잘 살던 시대가 있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도 누군가의 손을 빌려 태어납니다. 이 세상 갈 때도 누군가의 손을 빌려 가게 됩니다. 내 맘대로 멋대로 살다가는 건 자유라지만 마지막 가는 길까지 생판 모르는 남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제는 축하해주고 안아 줄 어린이도, 공경 받아야 할 어버이도 없어지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소중한 가정의 달. 어린이에게는 더 따뜻한 보살핌을, 어버이에게 스승에게는 더 진정한 공경을, 부부간에는 더 아름다운 사랑을 갖는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건강 조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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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3
  • 이직한 직장에서 발생한 상병의 업무상재해 여부
    [요지] 콜센터 상담원의 ‘뇌기저핵출혈’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문제된 사건.(대법원 2023. 4. 13. 선고 2022두47391 판결) [개요] 콜센터 상담원인 원고가 다른 콜센터 사업장에서 4년 2개월간 근무 후 이 사건 콜센터 사업장으로 이직하여 7개월 동안 근무하다가 근로시간 중 식사시간에 쓰러져 ‘뇌기저핵출혈’의 상병(이하 ‘이 사건 상병’이라 합니다)이 발생하였는데, 피고 근로복지공단이 원고에게 약 2년 전부터 고혈압 증상이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요양불승인결정을 하자 그 취소를 구한 사안. [대법원 판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5조 제1호에서 정한 ‘업무상의 재해’란 근로자의 업무수행 중 업무에 기인하여 발생한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업무와 사망의 원인이 된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적어도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에 겹쳐서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켰다면 그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하고,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며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는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평소에 정상적인 근무가 가능한 기초질병이나 기존질병이 직무의 과중 등이 원인이 되어 자연적인 진행속도 이상으로 급격하게 악화된 때에도 증명이 있는 경우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때 업무와 질병 또는 사망과의 인과관계 유무는 보통 평균인이 아니라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20. 5. 28. 선고 2019두62604 판결 등 참조).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적용 대상인 근로자가 여러 개의 사업장을 옮겨 다니며 근무하다가 질병에 걸린 경우, 당해 질병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근로자가 복수의 사용자 아래에서 경험한 모든 업무를 포함시켜 판단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대법원 2017. 4. 28. 선고 2016두56134 판결 등 참조).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1항 제2호, 제5항, 같은 법 시행령 제34조 제3항 [별표 3]의 규정 내용·형식·입법 취지를 종합하면, 같은 법 시행령 [별표 3]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기준(이하 ’인정 기준‘이라 한다)’은 같은 법 제37조 제1항 제2호에서 정한 ‘업무상 질병’에 해당하는 경우를 예시적으로 규정한 것이고, 그 기준에서 정한 것 외에는 업무와 관련하여 발생한 질병을 모두 업무상 질병에서 배제하는 규정으로 볼 수 없다(대법원 2014. 6. 12. 선고 2012두24214 판결 참조). ‘인정 기준’의 위임에 따른「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및 근골격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2022. 4. 28. 고용노동부 고시 제2022-40호, 이하 ‘현행 고용노동부 고시’라 한다)은 대외적으로 국민과 법원을 구속하는 효력이 있는 규범이라고 볼 수 없고,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내부적인 업무처리지침이나 법령의 해석·적용 기준을 정해주는 ‘행정규칙’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근로복지공단이 처분 당시에 시행된 ‘고용노동부 고시’를 적용하여 산재요양 불승인처분을 하였더라도, 법원은 해당 불승인처분에 대한 항고소송에서 해당 불승인처분이 있은 후 개정된 ‘현행 고용노동부 고시’의 규정 내용과 개정 취지를 참작하여 상당인과관계의 존부를 판단할 수 있다. 다만, ‘현행 고용노동부 고시’는 기존의 고시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하였다는 반성적 고려에서 재해자의 기초질환을 업무관련성 판단의 고려사항으로 보지 않도록 종전에 규정되어 있던 ‘건강상태’가 삭제되어 있으므로, 이와 같은 개정 경위와 목적을 고려할 필요가 있고,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휴일·휴가 등 휴무시간, 교대제 및 야간근로 등 근무형태, 정신적 긴장의 정도, 수면시간, 작업 환경, 그밖에 그 근로자의 연령, 성별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I. 1. (다)목 후단]. 따라서 ‘업무시간’은 업무상 과로 여부를 판단할 때 하나의 고려요소일 뿐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대법원 2022. 2. 11. 선고 2021두45633 판결 등 참조). 이러한 기준에 따라 대법원은, 적어도 원고가 ‘콜센터 상담원’으로 근무한 전체 기간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포함시켜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하여야 하고, 근무형태・업무내용・휴게시간・휴게장소・근무시간 등에 비추어 이 사건 콜센터 사업장에서의 근무 강도와 이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으며, 이 사건 콜센터 사업장의 근무환경이 근로기준법 등 관련 규정이 준수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법한 근무환경에 비해 과도한 수준의 육체적・정신적 피해와 스트레스를 유발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들어, 업무로 인한 재해가 아니라고 판단한 원심의 판단에 업무상 재해의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법리오해의 잘못이 있다고 보아 이를 파기·환송하였습니다. 사례제공 : 박범진 변호사 (서산시 공림4로 22, 현지빌딩 4층, 상담전화 : 041-668-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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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3
  • 부사를 찾아서 -한하운 자화상-
    나이와 기억력은 반비례한다. 자꾸만 도망가는 기억력을 붙잡기 위해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한편의 시를 낭송하기 위해 요즘 필자의 녹슨 머리로는 백번을 읽어 봐야 제대로 낭송할 수 있다. 고기는 씹을수록 맛이 난다고 했다. 낭송을 해 보니 시(詩)도 고기처럼 외우면 외울수록 맛이 났다. 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시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속껍질까지 벗겨 알맹이를 먹는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 며칠 전 문둥이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 시인의 자화상을 낭송하기 위해 1960년 3월 신흥출판사에서 발행한 『황토길』에서 시를 찾았다. 한하운의 시 ‘자화상’은 시인 자신의 자화상을 그림처럼 표현한 시다. 인간의 감정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석고상처럼 굳어진 얼굴과 그걸 바라보며 단장의 페이소스를 그려낸 작품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는 1919년 함경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배울 만큼 배우고 청운의 뜻을 품고 인생의 힘찬 발걸음을 떼려 할 때 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운이 찾아왔다. 바로 천형이라는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사랑하던 여인에게 일방적으로 절교하며 죽음 같은 아픔과 절망을 오직 시(詩)에 의지하여 버텼다. 그는 시를 영혼으로 썼다. 눈물로 썼다. 그에게는 시는 종교였고 시에 귀의하여 살았다. 1947년 남하하여 모진 천대와 생활고를 겪으며 오로지 시를 붙들고 살았다. 시 몇 편을 종이에 써 들고 출판사를 찾아갔으나 거지 취급하여 쫓겨나고 다방에 들어가 손님에게 시를 팔았다고 했다. 그는 그게 돈이 되었다고 했다. 1947년이면 해방이 되고 2년이 되던 해다. 시를 사는 사람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요즘에는 문학의 위기라고 한다. 도무지 책을 읽지 않는 시대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는 점차 유명한 시인이 되어갔다. 1949년 3월에 서울신문에서 발행하는 신천지 4월호에 13편의 『한하운 시초』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바로 거기에 자화상이란 시가 포함되어 있다. 한 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그러한 슬픔에 굳어 버린 나의 얼굴//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 가는 시장끼냐//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이냐//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검은 눈썹 언저리에 메워 본 덧없음을 이어//오늘 꼭 가야 할 아무 데도 없는 낯선 이길 머리에/쩔름 쩔름 다섯 자보다 좀 더 큰 키로 나는 섰다//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둔히 온 땅을 덮는 것이냐//지나는 거리마다 쇼 윈도우 유리창마다/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낭송을 잘하려면 최상의 호흡과 강약조절과 맛을 내야 제멋을 낼 수 있다. 연습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낭송하는 모습에서도 배울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7연 둘째 줄 ‘이렇게도 우둔히’를 ‘우득히’로 발음하여 낭송하고 있는 걸 보았다. 내가 틀렸는가 하여 시집을 찾아보니 틀림없이 ‘우둔히’로 되어있다. 다시 한하운의 ‘자화상’을 검색하여 보니 인터넷에는 모두 ‘우득히’로 나와 있다. 시는 함축적인 문학이다. 그래서 단어 하나, 줄 하나를 허투루 할 수 없다. 의미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정확한 시어를 알아내기 위해 발행한 시집을 찾아다녔다. 놀랍게도 시집마다 다르게 표현되었다. 1949년 5월에 나온 『한하운 시초』에서는 ‘이렇게도 우두히 웬땅을 덮는 것이냐’로, 1960년 신흥사에서 나온 『황토길』에서는 ‘이렇게도 우둔히 웬땅을 덮는 것이냐’로, 그리고 1987년 문지사에서 발행한 『보리피리』에서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땅을 덮는 것이냐’로 되어있는 것이다. 의문을 풀 길 없어 내가 아는 국문과 교수 몇 분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으나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그런지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인터넷 한하운 문학관도 있고 한하운 문학회도 있었다. 관계되는 사람을 찾아 위 내용을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모두 처음 듣는 소리라 했다. 그중에 어느 분이 말하길 한하운 시인 본인이 그렇게 고쳐서 발행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시집을 찾아다니느라 애를 먹었다. 도서관으로, 학교로. 지인에게, 문학관으로, 그러다가 마침 당진문학관에 1955년 발행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가 있는 걸 알았다. 초대 당진문학관 상주 작가이셨던 김성구 박사님이 쓰신 스토리텔링 자료에 그 책의 소개가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114 안내를 받아 당진문학관에 전화를 걸어 방문 의사를 물었더니 고맙게도 쾌히 승낙해 주었다. 마침 관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따님까지 함께 계셨다. 어찌 알고 왔느냐기에 김성구 박사님이 쓰신 글을 보았노라고 했다.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문학관 소재 두 번째 시집 1955년의 『보리피리』 속에는 자화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발행된 문지사의 『보리피리』엔 분명히 ‘우득히’라고 되어있다.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김성구 박사님이셨다. 그는 목사님이시면서 국제문학 발행인이시기도 하다. 오랜만에 목소리라도 들으니 참으로 반가웠다. 당진문학관 관장에게서 전화가 왔었노라고 했다. 관장이 “어찌 알고 왔느냐”기에 김 박사님 말씀을 드렸더니 그래서 연락이 갔던 모양이다. 마침 전화가 연결되었기에 그 말씀을 드렸다. ‘우두히’, ‘우둔히’, ‘우득히’ 우리는 이 부사를 가지고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의견을 나눴다. ‘우둔히’는 ‘어리석고 둔하다’의 뜻이고 ‘우득히’는 ‘우뚝하다’의 옛말이란 말씀도 해주셨다. 어쨌거나 시인의 그림자는 어느 부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뜻은 전혀 달라진다. 병들고 보잘것없는 몸의 그림자가 어리석게 땅을 덮느냐와 우뚝 솟은 그림자를 오히려 비웃는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낭송하는 사람의 어감(語感)상 ‘우득히’란 말이 더 힘있게 들린다. 그래서 모두 ‘우득히’를 선택하여 낭송하는지 모르겠다. 새삼 언어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격이 드러나게 되고 의사전달 여부가 결정된다. 더구나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은쟁반에 금사과 같은 시어를 찾아냄이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느냐의 절대 조건이 아닐까? /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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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5
  • 업무방해의 위력 여부
    [요지] 업무방해의 위력 여부가 문제된 사건. (대법원 2023. 3. 30. 선고 2019도7446 판결) [개요] 000고등학교 교장인 피고인이 2016년도 신입생 입학 사정회의 과정에서 면접위원인 피해자들에게 “참 선생님들이 말을 안 듣네. 중학교는 이 정도면 교장 선생님한테 권한을 줘서 끝내는데. 왜 그러는 거죠?” 등 특정 학생을 합격시키라는 취지로 강압적인 발언을 하여 특정 학생의 면접점수를 상향시켜 신입생으로 선발되도록 함으로써 위력으로 면접위원들의 신입생 면접 업무를 방해하였다는 공소사실로 기소된 사안. [대법원 판단] 형법상 업무방해죄에서 말하는 ‘위력’은 반드시 유형력의 행사에 국한되지 아니하므로 폭력·협박은 물론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와 권세에 의한 압박 등도 이에 포함되지만, 적어도 그러한 위력으로 인하여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될 정도의 세력에는 이르러야 한다. 한편 어떤 행위의 결과 상대방의 업무에 지장이 초래되었더라도 행위자가 상대방의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거나 업무상의 지시를 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경우에는 그 행위의 내용이나 수단이 사회통념상 허용될 수 없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도16718 판결, 대법원 2013. 3. 14. 선고 2010도410 판결 등 참조). 또한 업무방해죄의 성립에는 업무방해의 결과가 실제로 발생할 것을 요하지 아니하지만 업무방해의 결과를 초래할 위험은 발생하여야 하고, 그 위험의 발생이 위계 또는 위력으로 인한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되어야 한다(대법원 2005. 4. 15. 선고 2002도3453 판결 등 참조). 대법원은 ① 피고인과 피해자들을 비롯한 신입생 입학 사정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위 사정회의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여 최종 합격자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면접 점수가 조정될 수 있음을 양해하였던 점, ② 피해자들이 특정 학생의 면접 점수를 조정하기로 한 것은 피고인이 이 사건 발언을 통해 어떠한 분위기를 조성한 영향이 아닌 사정회의 구성원들이 이 사건 사정회의에서 논의한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보이는 점, ③ 이 사건 발언 경위 등에 비추어 피고인이 이 사건 발언을 하면서 다소 과도한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피해자들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거나 사회통념상 허용할 수 없는 위력을 행사였다고 보기 어려운 점, ④ 피고인이 업무방해의 고의로 이 사건 발언을 하였다고 보기도 어려운 점 등을 이유로, 업무방해죄를 유죄로 인정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 사례제공 : 박범진 변호사 (상담전화 : 041-668-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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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5
  • ‘3요’의 물결이 다가오는데
    고위직에 있는 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젊은 직원에게 오더를 주면 일부는 “이걸 왜 해야 하나요?”라는 물음이 돌아온다고 한다. 이유를 설명해줘도 끝내 수긍하지 않아 난감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규정에 있는 일이다.”라고까지 말하지만 “그렇다면 규정을 고쳐야지요.”라는 대답이 올 때는 당황스럽기조차 했다고 한다. “비록 규정이 잘못되어 고쳐야 할지라도 고칠 때까지는 해야 할 것 아니냐?”며 다독여야 하는 현실이 혼란스럽다고 했다. 회식을 하자고 하면 “아이와 약속이 있다.”,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알려 달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회식도 근무의 연장’이라고 한다면 ‘시간외수당을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했다. 출근도 약속이나 한 듯 9시 정각에 맞춰 단체로 사무실에 들어온다고도 하니 그 노력이 가상하다할까? 최근 대기업 임원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3요’ 주의보가 내렸다고 한다. 상사가 업무를 지시하면 젊은 직원 가운데는 “이걸 요?” “제가요?” “왜요?”라며 되묻는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하여 임원들을 대상으로 ‘3요’의 의미와 이에 대한 모범 답안을 자료로 만들어 나누어준 기업도 있다고 한다. 모임에서, 이런 세태를 글로 쓰고 싶다고 하니,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오히려 경향을 부추기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는 이유였다. 필자의 글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무엇이든 시간문제일 뿐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기성세대들이 하루라도 빨리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쓰기로 했다. 변화하는 상황을 공감케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이야기를 덧붙인다. 요즘 어느 부처의 Z세대 수습사무관가운데 일부의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가 괴담처럼 전해진다고 한다. 한 사무관이 병가를 내면서 사유에 ‘과장님 잔소리’라고 써냈다고 한다. 어느 과장은 수습사무관에게 일을 시켰는데 “못하겠다.”며 거절했다. 과장이 이유를 묻자 “나중에 저의 장관 인사 청문회에서 문제가 될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비상한 기개에 눌려 과장은 차마 나무라지도 못했다고 한다. 전후 맥락이 지워진 불균형한 서사가 어쩐지 의심스럽다. 과장의 상습적인 괴롭힘에 시달리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지른 SOS 신호는 아닐까. 정말로 청문회에서 문제가 될 만한 부당한 지시를 받았다면? 참된 공직자라면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게 맞는다. 돈 많이 주는 직장을 좇아 너도나도 민간 기업으로 떠나는 시대에 공직에 뼈를 묻겠다는 결의를 오히려 높이 사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엘리트들의 세계에서 나왔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 아니어도’라고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럴까? 하지만 한편 새겨볼 필요가 있다. 도청으로 전입하자 계의 막내인 필자는 일찍 출근하여 선배들 캐비닛에서 서류 상자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로 일과를 시작했다. 상사는 물론이고 선배가 퇴근하지 않으면 허드렛일을 맡아하거나 하릴 없이 기다렸다. ‘가사 불구’ ‘개인사정 불구’하고 오로지 사무실이 생활공간의 전부다 시피 했다. 도민이 아니라 ‘임명권자이신’을 강조하는 상사의 권위주의가 마음에 거슬릴지라도 군말 없이 해야 했고 최소한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당시는 규범이었다. 요즘은 퇴근시간이면 “먼저 가겠습니다.”며 총총히 사라지는 젊은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중간관리자가 제일 난처하다고 한다. 기성세대는 ‘3요’현상을 요즘 젊은이들의 성향쯤으로 보는 듯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자주 듣던 “요새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정도쯤으로 여겨도 될까? 소크라테스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한 것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사고와 행동방식에는 간극이 있게 마련인가 보다. 하지만 상사의 “그냥 하라”는 말만큼 공허한 지시가 없다. 어쩌면 ‘3요’가 불편한 진짜 이유는 시키는 사람도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해서일 수 있다. 그러자면 상사가 먼저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물음에 대처할 수 있는 논리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직장에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걸겠다는 생각이 엷어지는 젊은 세대들에게 ‘기본’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직장인의 로망으로 여기는 승진이나 인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물결을 거스르거나 막을 수 없다. 제비 한 마리가 봄을 오게 할 수는 없더라도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니까. 기성세대가 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동기부여만 된다면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세대들이다. 일견 MZ세대들의 당돌한 모습이 부럽다. ‘다만’이라는 단서는 생략한다. 스스로 판단할 문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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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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